1983년 동아일보 주최 장편소설 당선작인 『혼불』의 작가 최명희는 그 소설의 후기에 이렇게 썼다.
“‘꾼’이 어떤 일을 직업적으로 혹은, 습관적으로 하면서 세월이 갈수록 재주를 익히고 기교를 터득하며 매끄러워지는 사람이라면, ‘쟁이’는 그와는 좀 다르지 않을까. 제 목숨의 짓을 못이겨 저절로 넘치는 피를 끌어안고, 갈고, 다듬다가, 결국은 구극(究極)에 도달하여 본질(本質)과 한 덩어리로 어우러지는 사람”이라고.
‘꾼’과 ‘쟁이’를 정의하는 작가의 시각이 잘 드러나 있는 글이어서 뇌리에 남아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최명희 작가의 풀이를 빌려 야구판에 빗대어 말하자면, 기능이 아주 뛰어난 선수(타자든 투수든 간에)는 ‘꾼’으로, 단순히 기능뿐만 아니라 장인정신까지 갖춘 선수라면 ‘쟁이’로 불러 마땅하지 않을까.
최근 추신수(40. SSG 랜더스)가 경기 후 방송에 수훈선수 인터뷰를 하면서 “주인공이 되기보다 조연을 더 좋아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 말은, 단순히 자신을 낮추어 겸양하는 차원을 넘어 그가 어떤 정신과 자세로 경기에 나서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참 좋은 말이다. 그가 SSG 구단의 후배 선수들에게 끼치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생각한다면, 그의 너른 품새를 드러내는 단적인 표현일 것이다.
추신수는 7월 12일 키움 히어로즈 전에서 득점기회를 범타로 놓치자 헬멧으로 얼굴을 덮는 장면이 방송 화면에 잡혔다. 스스로 아쉬움을 달래고 무안함을 감추려는 행동이었을 것이다.
여느 선수들 같으면 덕아웃으로 돌아서면서 육두문자를 날린다는가 하는 볼썽사나운 행동으로 스스로 화를 내기 십상인 터에,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아주 절제된 행동거지를 보였다.
추신수가 헬멧으로 얼굴을 가려 그 순간의 감정을 날 것 그대로 노출 시키지 않는 그 모습도 참 좋다.
그라고 왜 울화가 치밀지 않을까 보냐. 그런 장면에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식빵’을 날리는 선수들을 숱하게 봐온 터여서, 추신수의 그런 행동은 자못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굳이 특정 선수를 거명하고 싶지는 않다. 애꿎은 헬멧을 패대기쳐 물의까지 빚었던 선수가 있었는가 하면, 툭하면 덕아웃으로 들어가면서 누가 봐도 욕설임을 알 수 있는 입 모양을 하거나 침을 퉤퉤 내뱉는 선수도 있다. 수도권 구단의 중심타자 아무개와 아무개는 볼썽사나운 입 모양으로 ‘식빵 선수’라는 달갑지 않은 소리도 듣는 마당이다.
야구장에서 유명 선수들의 여과 없는 감정 배설은 보는 이를 몹시 불편하게 만든다. 그들에게 그라운드는 ‘신성한 일자리’일 터인데, 그들 스스로 그런 자리를 입에 붙어 있는 육두문자와 쌍소리로 더럽히면 되겠는가. 그들이 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방송 화면에 버젓이 식빵 소리를 드러낼 때면, 무안함을 넘어 안타까운 마음마저 든다.
추신수는 『오늘을 즐기고 내일을 꿈꾸다』는 책에 “화려함보다는 꾸준함을 응원하며, 이기기보다는 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라”는 자신의 좌우명을 소개하며 “저는 단지 ‘야구’라는 조금 다른 방법으로 ‘인생’이라는 같은 계단을 오르고 있는 당신의 든든한 친구가 되었으면 한다”고 썼다. 이런 유형의 글에 다소 과장이나 수식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의 ‘진정성’이 느껴져 가슴에 와닿는다.
그저 배트를 잘 휘두르는 꾼이 아니라 장인정신이 야구판에도 살아 있으면 좋겠다. 오늘도 식빵을 날리는 그대들이여, 모름지기 추신수를, 그의 절제의 미학을 보고, 배우면 좋지 않겠는가.
/홍윤표 OSEN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