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백종인 객원기자] 첫 경기부터 빡세다. 엎치락뒤치락. 승부가 몇 번이나 바뀌는 지 모른다. 동점-역전-또 동점-또 역전…. 무한반복이 이어진다. 급기야 연장이 필요해졌다. 그러던 10회 초다. 6-6의 긴장감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2사 1, 2루. 언더독의 득점 기회다. (1일 문학구장, 키움-SSG 한국시리즈 1차전)
타석의 전병우가 만만치 않다. 앞 타석 투런포의 주인공 아닌가. 숀 모리만도의 까다로운 유인구를 잘 버티고 있다. 카운트 1-2은 어느덧 3-2로 꽉 찼다. 살얼음 같은 6구째를 앞두고서다. 갑자기 2루 주자가 바빠진다. 야시엘 푸이그다.
그는 갑자기 3루코치가 된다. 타자를 향해 열심히 뭔가 ‘사인’을 보낸다. 양손을 아래로 누르기도 하고, 오른손으로 자기 가슴을 치기도 한다. 곁에 있던 2루수 김성현이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본다. ‘지금 뭐하는 거니?’ 하는 표정이다.
중계방송하던 박용택 해설위원(KBS)은 웃음을 터트린다. “지금 푸이그 선수가 계속해서 공을 낮게 보라고, 그러고 있는데….”
이 말이 끝나기도 전이다. 모리만도의 6구째가 발사된다. 순간 타자의 배트가 힘껏 돈다. 낮게 떨어지는 체인지업(135㎞)에 깔끔한 타이밍이다. 빨랫줄 하나가 좌익수 앞에 널린다. 야생마가 3루를 돌았다. 홈에서 화려한 슬라이딩으로 결승점을 신고한다. 그리고는 열광적으로 1루쪽을 가리킨다. ‘거봐, 내가 뭐랬어.’ 하는 모습이다. 우승 확률 76.3%가 결정되는 찰라다.
푸이그 시리즈다. 준PO 때 그랬다. PO 때도 마찬가지다. 한국시리즈라고 왜 아니겠다. 화제의 중심에 그가 있다. 잠자던 능력치가 되살아났다. 퍼포먼스뿐만이 아니다. 에피소드도 줄줄이 이어진다.
KS 미디어데이 때였다. 기억력 좋은 누군가 묻는다. “개막 직전에 공약을 걸었다. ‘우승하면 선수단과 팬들을 초청해 마이애미 집에서 파티하겠다.’ 그 약속이 여전히 유효한가.” 그러자 당사자가 흔쾌히 시인한다. “물론이다. 팀원들을 초대해 함께 기쁨을 나누겠다.” 빈 말이라도 좋다. 어쨌든 통 크기 하나는 메이저리그 급이다.
잔잔함도 있다. 어머니의 편지다. 마르티자 발데스 씨의 마음이 구단을 통해 미디어에 공개됐다. 지난 7월 올스타 브레이크 때 한국 방문에 대한 감사 인사가 정중하다. 이어 큰 승부를 앞둔 팀에 대한 당부와 기대도 포함됐다. 이런 내용이다.
“저는 히어로즈가 남은 경기에 승리해 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하기를 응원합니다. 히어로즈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구단의 환대와 제 아들을 잘 보살펴 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또한 올 시즌 여러분이 달성한 여러 업적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2루는 민감한 곳이다. 갈등과 논란이 끊이지 않는 자리다. 한마디로 분쟁 지역이다. 전세계 어느 리그나 마찬가지다. KBO라고 예외일 리 없다. 주자에게 투포수, 타자가 한 눈에 보인다. 배터리 사인도 훤히 드러난다. 마음만 먹으면 타자에게 힌트를 줄 수 있다.
지난 9월 말이다. 롯데와 LG전에서 시비가 일어났다. 구승민이 2루 주자(문보경)를 향해 뭔가 불만을 터트렸다. 투구판에서 빠지면서 바지춤을 만지는 동작을 흉내냈다. ‘타자에게 사인 알려주지 마라’는 얘기였다. 문보경은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고참 김현수가 뛰쳐나왔다. 양팀 벤치가 잠시 청소시간을 가졌다. 정리된 뒤에도 한동안 씩씩거렸다.
이후 구승민은 취재진에 이런 얘기를 남겼다. “벤치 클리어링을 유발할 의도는 없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굳이 안 해도 되는 부자연스러운 동작이 있었다. 혹시나 해서 사인을 바꿔봤는데, 사인에 따라 다른 손이 움직이더라. 나름대로 확신이 있었다.” 물론 LG측은 “절대 아니다”라며 부인했다.
대부분 상대는 2루 주자에 예민하다. 사소한 동작 하나하나를 눈여겨본다. 이를테면 ▶ 헬멧을 만지는 손 모양 ▶리드하면서 벌리는 팔의 방향 ▶ 어느 쪽 바지를 만지는지 ▶리드할 때 먼저 나가는 발이 어느 쪽인지 ▶고개를 어느 쪽으로 꺾는지 ▶ 흙 파는 발 ▶기타 등등. 이런 게 사인을 알려주는 신호로 의심받을 수 있다.
물론 어느 것도 물증은 없다. 자백도 있을 리 없다. 심증만 있을 뿐이다. 또한 규정 위반도 아니다. 전자장비를 이용한 사인 훔치기만이 제재 대상이다. 다만 불문율의 영역이다. 피해자(또는 피해 호소인)의 짜증과 비난, 그리고 빈볼의 원인이 된다.
임시 예방책도 있기는 하다. 투수의 수신호다. 손가락 하나 또는 둘로 표시하는 방식이다. 2루 주자가 안 보이게, 어깨 정도 위치에서 낸다. ‘하나면 (포수의) 첫번째 사인을 받겠다, 두 손가락이면 두번째를 받겠다’ 같은 약속이다.
일단 전제가 필요하다. 어제(1일) 푸이그의 동작이 문제다, 잘못됐다는 뜻은 아니다. 여기에 대한 공식 또는 비공식적인 이의제기는 알려진 바 없다. 무엇보다 타이밍도 다르다. 타자를 향한 제스처도 투포수간 사인 교환이 나오기 전이었다. “낮게 보라”는 박용택 위원의 해설에 충분히 공감한다.
다만 고려해야 할 점이 있다. 오해의 소지다. 말했다시피 민감한 지역의, 첨예한 상황이다. 그곳에서, 그런 시국에. 그렇게 크고 다양하고, 노골적인 동작은 일반적이지 않다. 게다가 캐릭터도 감안해야 한다. ML 때부터 여러 돌출행동으로 구설에 오르내렸다.
공교롭게도 직후에 결승타가 터졌다. 제대로 떨어진 체인지업을 완벽하게 때려냈다. 그런 대단한 타격이 오해와 의심으로 폄훼되면 곤란하다. 최고의 무대에는 최고의 플레이가 어울린다. 오얏나무 아래서는 오해받을 일 없어야 한다.
칼럼니스트 일간스포츠 前 야구팀장 / goorada@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