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클볼이라도 배워야 하나…정찬헌, 노경은의 길을 가나
OSEN 백종인 기자
발행 2023.02.16 17: 00

[OSEN=백종인 객원기자] 빨간 양말의 시애틀 원정 때다. 게임 전 몸풀기가 한창이다. 누군가 쪽지를 전한다. “불펜 던지는 걸 볼 수 있을까요?” 홈 팀 투수의 정중한 부탁이다. 당장 오늘 선발인데? 상대 팀에서 보러 오겠다고? 설정 자체가 말도 안되는 얘기다.
하지만 뜻밖이다. 흔쾌한 OK 사인이다. “그럼요. 와서 보세요.” 2008년의 일이다. 신청자는 33살이던 R.A. 디키다. 너그러운 빨간 양말은 42살이던 팀 웨이크필드였다. 너클볼 장인이다.
그러니까 ‘마구 수업’이다. 원정 팀 불펜이 달궈진다. 곧 나갈 선발 투수의 예열이 시작됐다. 이를 지켜보는 수강생은 눈에서 빛이 난다. “실밥은 어떻게 잡는 거죠?” “릴리스 느낌은 어떤가요?” “손가락을 튕겨야 하나요?” “아니면 찍어야 하나요?” 질문이 쏟아진다. 10분만 보겠다더니, 45분을 그러고 있다.
4년 후. 수강생은 청출어람이 됐다. 리그 최고의 너클볼러로 변신했다. 사이영상까지 받게 됐다. 수상 소감이다. “(웨이크필드의 수업을 회상하며) 그 때 배움이 큰 도움이 됐어요. 누가 그렇게 해줄 수 있겠어요. 평생 감사한 마음을 간직할 거예요.” (R.A. 디키)
인사에 대한 반응이 쿨하다. 일타강사의 말이다. “뭘 그 정도 가지고. 나도 예전에 그랬어. 몇 시간씩 비행기 타고 찾아다녔지. 집까지 찾아가서, 녹음기도 틀었지. 우.린. 서.로.가. 그.래.” (팀 웨이크필드)
노경은이 부산 주민일 때다. 2017~18년이 암울했다. 사직과 상동을 오락가락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2군 코치와 캐치볼 하던 중이다. 크리스 옥스프링이다. 한 번씩 이상한 공이 날아온다. 종잡을 수 없이 꿈틀거리는 구질이다. 글러브로 받기도 어려웠다.
“이거 어떻게 던지는 거예요?” “그냥 이렇게 잡으면 돼.” 어렵지 않다. 간단한 그립을 보여준다. 원래 그렇다. 너클볼은 쉽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던진다. 다만 제대로 던지기 어려울 뿐이다. 그래서 그들끼리는 이렇게 통한다. ‘배우는 데 10분, 익히는 데 평생’이라고.
2018시즌 막판이다. 실전에 한번 써봤다. 쓸 만했다. 그러나 기회는 쉽지 않았다. 이듬해. 노경은은 1년을 통째로 날렸다. FA 미아였다. 호주로 날아갔다. 거기서 사부 옥스프링과 재회했다. 비기를 연마할 기회였다. 영점을 잡고, 꿈틀거림을 극대화했다. 상용화 가능성을 높였다.
그리고 2020년. 다시 갈매기가 됐다. 선발의 한 축을 맡았다. 5승 10패였지만, 11번의 QS를 해냈다. 와중에 마구도 세상 구경을 했다. 어느 날 친정 두산과 경기였다. 실험 대상은 오재원이었다. 멀뚱히 서서 삼진을 먹었다. 107㎞짜리였다. 피해자는 “와”하며 감탄사를 뱉었다. 포수한테 묻는다. “방금 그거 커브였어?”
여기저기서 화제가 됐다. 일본 매체 풀카운트는 “멸종 위기였던 너클볼이 한국에 나타났다”며 관심을 보였다. ESPN의 ‘피칭 닌자(롭 프리드먼)’도 흥분했다. “세상에, KOB리그에 팀 웨이크필드 주니어가 나타났다.”
OSEN DB
너클볼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필 니크로(1939~2020)다. 어린 시절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아버지는 탄광촌 광부였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 바빴다. 하루는 스카우트가 집을 찾았다. 아들의 계약금으로 250달러를 제시했다. 햄버거 하나에 15센트였던 시절이다. 요즘이라면 2만~3만 달러(약 3000만 원)의 가치다.
의외로 아버지의 대답은 No였다. “우린 그만한 돈이 없어요.” 돈을 내고 입단해야 한다는 얘기로 들은 것이다. “그게 아니라고 했더니 놀라시더라구. 매일 2달러씩 식비도 준다고 하니까 무척 기뻐하셨어.” 필 니크로의 회고다.
팀 웨이크필드의 은퇴식 때다. 눈물을 흘리며 이름을 열거한다. 이들의 빠지지 않는 의식이다. 필 니크로, 찰리 허프, 톰 캔디오티, R.A. 디키…. 동료 너클볼러들에 대한 감사와 존경이다.
그들의 공통점이 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을 때, 절망만 남았을 때, 벼랑 앞에서. 그 때의 선택이 너클볼이었다. 길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거친 끝이다. 그래서 서로에 대해 각별하다. 당장 붙는 상대 팀이라도 기꺼이 가르칠 정도다.
OSEN DB
정찬헌이 아직도 직장을 못 구했다. 모 구단이 관심을 보인다지만, 진척이 더디다. 이 상황에 원 소속팀은 확고하다. 결별 방침은 불변이라고 했다. (사인 앤) 트레이드도 가능하다. 하지만 공짜는 없다는 방침이다.
이대로면 언제 해결될 지 감감하다. 자칫하면 길어질 수 있다. 5년 전 노경은이 걸었던 길이다. 어쩌면 그도 너클볼을 배워야 할 지 모른다. 그 공에 담긴 뜻이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다.
칼럼니스트 일간스포츠 前 야구팀장 / goorada@osen.co.kr

Copyright ⓒ OSEN.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