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빠이' 이상용이 故현미를 향한 그리움을 전했다.
14일 방송된 TV조선 '스타다큐 마이웨이'에는 '뽀빠이' 이상용이 출연했다.
올해 80세가 된 이상용은 과일과 야채가 가득한 아침 식단을 공개했다. 그는 "5년째 제 아침식사다. 이 이상 안먹는다. 많이 먹었는데 이제 입맛도 없어서 야채류를 아내가 해준다. 미숫가루 한컵, 맹물, 계란, 견과류. 아침에 밥에 된장을 먹으면 여기가 부글부글한다. 이렇게 먹으면 간단하고 가볍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상용은 다소 불편해보이는 걸음걸이로 눈길을 끌었다. 그는 "몇달전 다리가 부러졌다. 층계에서 넘어져서. 나이 먹으니 (뼈가) 잘 안붙는다. 회복 잘 안되고 살이 빠진다. 역기를 들고 하체운동 해도 다리에 살이 안 붙어서 절룩한다. 걱정하지 마라. 안아프다"고 밝혔다.
그간 500명이 넘는 심장병 어린이들의 수술비를 후원하는 선행을 이어왔던 그는 "내가 사회를 볼때 어떤 선생님하고 어머니 아버지가 왔다. 아이가 입술이 파랗다. 손톱도 파랗고. 수술비가 많아서 못한다더라. 그 당시에 내가 MC를 했을때 14000원 받았다. 근데 수술비가 1800만원이다. 내가 책임지겠다고 했다. 쥐뿔도 없는게 '기술 없어서 못 고치면 할 수 없다. 근데 돈때문에 못 고친다면 그건 내가 하겠다'고 했다"고 밝혔다.
이어 "세 군데 술집 사회를 봤다. 6개월을 선불로 받았다. 그래서 수술 시켰다. 그 아이가 1번이었다. 그 후로 엄마랑 아버지랑 사방에 얘기를 하고 다닌거다. 뽀빠이씨가 수술해줬다고. 전국 심장병 환자들이 우리집으로 왔다. 우리애도 수술해달라고. '하자!' 그래서 수술한게 567명을 수술했다"고 털어놨다.
특히 이상용은 소문난 애처가이기도 했다. 아내에게 그림 선물까지 했다는 그는 미모의 아내 윤혜영 씨를 공개했다. 화원에 방문한 이상용은 "사모님이 꽃보다 더 예쁘지 않냐"는 질문에 "가까이 가면 꽃이 수줍어서 죽는다"고 너스레를 떨며 애정을 드러냈다.
두 사람은 대학때부터 인연을 이어왔다. 이상용은 "대학 4학년때 아내가 졸업했을 때였다. 아는 사람 누나 집에 갔다가 거기서 같이 하숙하더라. 너무 예뻐서 내가 모든걸 멈췄다. 지금까지 후회 없다"고 말했다. 윤혜영 씨는 "나이가 1살 차이인거냐"는 질문에 "나이는 똑같다. 생일이 4개월 차이"라고 설명했다.
프로포즈 당시 상황도 전했다. 이상용은 "내가 이렇게 된거 만나자, 결혼하자. 내가 잘해주겠다. 갖은말 우리나라 좋은말 다 써서 꼬셨다. 평생 행복하게 해주겠다, 누구보다 잘해주겠다, 결혼하자. 그랬더니 싫다더라고. 내가 누구보다 잘해주겠다, 결혼합시다, 몇시간 꼬셔서 오케이 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윤혜영 씨는 "일단 착한 걸 봤고 행동도 씩씩하게 잘하고 다음에 나가서도 잘 적응하고 살겠다는 생각 했다"고 밝혔다.
이상용은 아내가 오랜 무명시간동안 생계를 책임졌다며 "고생을 말도 못한다. 너무 미안하다 그때 생각하면. 신문사에서 일했는데 교통사고로 그만뒀다. 전신깁스를 했으니까. 그렇게 크게 사고났다. 택시가 정류장에 있는 아내를 받았다. 공중에 붕 떴다. 살아 있다. 당시 딸이 임신 3개월이었다. 같이 날았다 떨어졌는데 죽을줄 알았는데 살았다. 걱정 많이 했다"고 털어놨다.
특히 이상용은 "지금 고백하지만 그 때 결혼할 때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말렸다. 나보고 결혼하지 마라. 미인박명이다. 예쁜사람은 명이 짧다. 두번 결혼할거라고 하지말라고 했다. 지금까지도 신경쓰인다. 혹시나 그게 맞으면 어떡하나. 일찍 죽으면 어떡하냐 그런 걱정 많이 했다. 처음 얘기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고향 충청남도 서천을 찾은 이상용의 모습도 공개됐다. 그는 생가가 있던 곳 찾아 "엄마가 여기서 시집살이를 많이 했다"며 젊은시절 아버지의 잦은 외도를 홀로 견뎌야 했던 어머니를 떠올렸다. 이상용은 "우리 아버지 원망 많이 했다. 가정적이지 않았다. 외향적이었다. 그래서 가족사진이 없다. 아버지와의 사랑이 없는거다. 내가 엄마 옆에 붙어있었다. 늘 아버지는 다방에 있었다. 데리러 가면 혼났다. 아버지가 무서웠다"고 말했다.
그는 "어머니가 저를 갖고 아버지 찾으러 백두산까지 갔다왔다. 그동안 내가 영향을 뭘 섭취했겠냐. 못먹었지. 어머니가 기진맥진해서 낳았는데 숨도 한참 있다 쉬고 죽겠다 싶었다. 온 동네가 '얘를 살리자' 해서 수십명의 마을 어머니들이 밭 매다가도 젖이 부르면 젖 먹이러 와서 살았다. 걸음마도 늦게 하고 정말로 산게 기적이었다. 어머니는 무조건 시부모님을 따르고 그땐 그럴수밖에 없었다. 죽는게 나을 정도로 심하게 시집살이를 했다. 엄마가 그 고생을 다 감수했다. 지금 엄마가 살아계시면 정말 잘해줄것같다. 너무 고생만 하시고 돌아가셨다"고 슬픈 심경을 토로했다.
이어 "엄마가 58세에 돌아가셨다. '모이자 노래하자' 녹화 도중에 소식 들었다. 그래도 웃고 녹화하고 갔다. 눈이 무릎까지 빠지는 날이었는데 서울에서 대전까지 4시간 걸렸다. 어머니는 벌써 돌아가셨다"며 "어머니한테 전하고 싶은 말은 욕심 안부리고 키만큼만 욕심 부리고 살겠다. 다른사람을 욕하지 않고 용서할거고 좋은일 하고 싶고. 괜찮은 놈이라는 말 듣도록 살겠다"고 말했다.
이후 절친 김홍신 작가와 만난 이상용은 후원금을 횡령했다는 누명을 썼던 과거를 떠올렸다. 그는 "평생을 다 바쳐서 600명 수술해줘서 잘 살아있는데 하나도 수술하지 않았다고 하니까. 전 국민이 지탄 하는거다. 나쁜놈으로. 저는 가만히 있었다. 하늘은 안다고 생각했다"고 털어놨다. 논란 당시 미국으로 건너가 생활했던 그는 "말도 마라. 미국에서 관광버스 가이드도 하고 하루에 14시간 버스타고 LA에서 라스베이거스까지 관광버스 가이드를 했다. 그러다 무죄로 판결이 났다. 무죄선고를 받음과 동시에 신문에 안내주더라"라고 씁쓸해 했다.
뿐만아니라 이상용은 평소 절친한 사이였던 故현미를 향한 마지막 인사를 전하러 가기도 했다. 이상용은 "여러분이 너무 좋아하던 마음속의 가수 현미 누나를 뵈러 왔다. 평소 저와 절친으로 저를 예뻐하고 좋아하셨다. 그래서 만나뵈러 왔다"며 지난달 갑작스레 사망한 故현미를 언급했다.
앞서 현미의 아들은 장지를 미국으로 옮기겠다고 밝혔던 바. 한번 더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은 마음에 고인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 머물렀던 곳을 찾았은 이상용은 "제가 평소에 갖고 있던 사진이다. 액자 만들어서 가져 왔다. 마지막 머물렀던 곳이라서 사진 놓고 평소 옥수수 좋아혔다. 항상 가지고 다녔다. 옥수수 삶아서 꽃하고 놓고 여기서 마음적으로 명복 빌려고 한다"며 "부고를 듣자 마자 갔더니 빈소를 안차렸더라. 미국에서 자식들이 오지 않아서. 그래서 나중에 다시 갔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어 "항상 상용이 동생이라 불렀다. 무대에서 '여러분의 밤안개 주인공 현미씨를 소개합니다'하면 나와서 '밤안개' 노래 나올때마다 튀어나오셨다. 활발하고 천상 연예인, 영원한 가수다. 사라지지 않은 가수. 살아있는 가수. 내가 소개하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것 같다"며 "누님 위에서 실컷 노래하고 우리한테 들리게 노래해달라. 들릴거다. 하도 목소리 좋아서. 꽃보다 아름다운 누나 잘 계시고, 죽지 않는 가수가 되어달라. 누나 안녕"이라고 인사했다.
이상용은 "한분 두분 가는걸 보며 내 차례로 돌아오는구나 생각 한다. 저 역시 열심히 하고 마음 바로잡고 늘 봉사하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살겠다"며 "세상에서 제일 어렵게 태어난 내가 가장 건강한 뽀빠이가 돼있다는거 긍지롭고 자랑스럽고 성공한 것"이라고 각오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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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TV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