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안방극장을 사로잡은 캐릭터 계보를 정리할 수 있을 만큼 좋은 활약을 보여준 배우들이 많았다.
‘연인’의 남궁민과 안은진부터 ‘킹더랜드’의 이준호, ‘더 글로리’의 송혜교와 임지연 등 이들은 자신의 매력을 살린 연기로 시청자들의 마음 속을 파고들었다. 변화 속에 자기만의 한 획을 더한 것이다.
◼️‘믿보배’ 남궁민
먼저 MBC 드라마 ‘연인’(극본 황진영, 연출 김성용)은 넷플릭스 ‘더 글로리’처럼 파트 쪼개기 방식을 택한 지상파 최초의 드라마였다. 빈틈 사이 시청자들이 달아날 법도 한데, 오히려 그 긴 공백을 이겨낸 애청자들의 결집력은 대단했다. 5.4%로 첫 출발한 ‘연인’은 마지막 회에서 무려 2배를 뛰어넘는 12.9%(닐슨코리아 제공·전국 기준)로 뜻깊게 마무리했다.
병자호란을 겪으며 엇갈리는 이장현(남궁민 분)과 유길채(안은진 분)의 사랑을 뜨겁게 뽑아내 사극 장르의 주요 서사를 살린 덕분이다. 병자호란은 역사에서 주로 패배로 기억되곤 했는데, ‘연인’에서는 관점을 달리해 백성들의 끈질긴 생존과 삶으로 풀어낸 것도 그들의 마음을 잡는 데 유효했다. 무엇보다 대사 한 줄도 맛깔나게 살리는 남궁민의 장점이 빛을 발했다고 볼 수 있다.
남궁민은 드라마부터 코믹, 액션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흥행보증수표로 자리잡은 비결이다. 좋은 대본을 보는 눈을 가진 것도 배우로서 중요한 능력인데 그는 선구안과 동시에, 시청자들에게 신뢰를 안길 수 있는 책임감 있는 자세까지 갖췄다. 늘 기대감을 끌어올리고 그걸 충촉시킨다.
◼️‘연인’의 다크호스, 안은진
‘연인’은 어둠을 빛의 서사로 바꾸는 데 성공한 드라마다. 평민, 노비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생각한 덕분에 유길채와 이장현이 전쟁 속에서 피워낸 사랑은 로맨스 이상이었다.
대중적 신뢰도가 탄탄한 남궁민과 만난 신예 안은진은 ‘연인’을 통해 안방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치열하고 성실한 면모를 입증하며 자신의 가치를 높였다.
비록 초반에는 ‘미스 캐스팅’이라는 오명을 얻기도 했지만, 안은진은 자기 자신을 믿고 노력한 끝에 마지막에 가서는 최우수 연기상을 거머쥐는 주인공이 됐다.
◼️‘킹더랜드’ 이준호, 아이돌 장점 살린 연기
웃음을 경멸하는 남자 구원(준호 분)과 웃어야만 하는 스마일 퀸 천사랑(윤아 분)이 호텔리어들의 꿈인 VVIP 라운지에서 진짜 환하게 웃을 수 있는 날을 만들어가는 이야기를 담은 JTBC 드라마 ‘킹더랜드’(극본 최롬, 연출 임현욱). 이준호는 재벌가 후계자 구원 역을 맡아 클래식한 캐릭터를 멋지고 해사하게 묘사했다.
이준호는 아이돌 출신 배우라서 그런지 짧은 시간 안에도 슬프고 기쁜 감정을 재빨리 끌어올리는 능력을 갖췄다. 가수들이 3~4분에 달하는 한 곡으로 무대에서 급변하는 감성을 표현하는 게 훈련이 된 덕분이랄까.
그래서 이준호는 전문적인 연기 훈련을 오래 받지 않았음에도 감정에 대한 이해가 빠르고, 감독들의 디렉션을 빠르게 흡수해 제 나름대로 소화해낸다. 임윤아와의 로맨스는 실제 연인을 방불케 하는 깊은 호흡으로 완성했다. ‘로맨스 킹’이란 수식어가 아깝지 않다.
◼️송혜교의 발견, ‘더 글로리’
지난해 12월 처음 공개돼 2023년 3월 파트2가 공개되고 나서도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극본 김은숙, 연출 안길호)는 시청자들에게 중독현상을 일으킨 하나의 신드롬이었다. 그 중심에는 문동은 역을 소화한 송혜교가 있다. 수많은 패러디와 밈 영상을 양산하며 주연부터 단역까지 모든 인물들이 함께 주목받도록 도왔다.
사랑스러움의 대명사였던 송혜교는 데뷔 이후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차갑고 냉혈한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더 글로리’로 연기 스펙트럼을 한 뼘 넓힌 것만은 분명하다. 이른바 송혜교의 재발견이었다.
송혜교의 아름다움만 기억하는 시청자라면, ‘더 글로리’ 문동은의 슬픔과 기쁨은 분명 낯설 것이다.
◼️임지연, ‘더 글로리’ 박연진 그 자체
“연진아~”라는 대사 한 마디로도 표현할 수 있었다. 임지연이 맡은 학폭 가해자 박연진 역할은 그녀가 단단한 연기력을 과시하며 배우로서 한층 더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됐다.
이 캐릭터로 인해 악역 이미지가 한동안 지속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딛고, 용기를 품어 마음껏 도전한 끝에 얻어낸 결과다.
임지연은 평소 수더분하고 밝은 모습이라, 박연진 캐릭터와 접점이 하나도 없어 보이나 본연을 철저하게 숨기고 배역에 완벽하게 녹아든 연기를 보여줬다. 임지연은 박연진, 그 자체였다. 과한 인물을 과하지 않게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힘과 흡인력을 타고난 듯하다.
그녀의 다양한 표정 변화를 통해 박연진이 느꼈을 두려움과 죄책감, 그리고 슬픔이 그대로 드러났다. 광기와 동정을 어쩌면 그렇게 여유롭게 오가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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