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벤저는 ‘지프’ 엠블럼을 달고 출시된 최초의 순수전기차다. 오프로드의 야성(野性)을 중시하는 지프는 그 동안 도심형 SUV에 인색한 편이었다. 레니게이드 정도가 도심형으로 분류될 수 있겠지만 그마저도 잦은 단종 소식으로 김이 빠졌다.
지프의 콤팩트 SUV 명맥은 새로운 접근 방식으로 활로를 찾았다. 스텔란티스 그룹의 내부 시너지와 전동화 트렌드에서 대안이 보였다.
마침 스테란티스 그룹 내에 적당한 플랫폼도 있었다. 푸조가 개발해 2008의 뼈대로 쓴 CMP다. CMP의 모듈식 전동화 플랫폼인 e-CMP2를 활용해 지프의 엔트리 모델을 개발하기로 했다.
이런 절차로 탄생한 전동화 모델이 ‘지프 어벤저(Jeep Avenger)’다. 오프로드의 DNA를 버릴 순 없으니 ‘전천후 도심형’ 전기 SUV가 됐다. 전장이 4,085mm로 레니게이드(4,255mm)보다는 꽤 작다. 하지만 실내 공간을 좌우하는 휠베이스는 거의 차이가 없다. 레니게이드가 2,570mm인데, 어벤저는 2,560mm다. 전동화의 장점을 살려 실내 공간을 유지하는데 활용했다.
문제는 외관 디자인이다.
종래에 없던 지프를 만들어내야 하는데, 더더구나 지프에는 아예 없던 도심형 전기 콤팩트 SUV를 개발하라는 프로젝트가 떨어졌다.
지난했던 개발과정을 지구 곳곳에 자리잡고 있는 스텔란티스 디자인 스튜디오를 온라인으로 연결해 들어봤다. 지난 4일밤, 서울 중심가의 한 공유오피스에서 미국과 유럽을 동시에 연결하는 온라인 삼각 편대가 구성됐다. 한국시간은 밤이지만, 미국과 유럽은 이른 아침이다. 미국의 디트로이트와 이탈리아 토리노에 있는 스텔란티스 디자인 스튜디오 엔지니어들이 한국에 있는 자동차 담당 기자들과 회동하는, 화상 간담회가 열렸다.
디트로이트에서 먼저 어벤저를 개괄적으로 소개했다.
맷 나이퀴스트(Matt Nyquist) Jeep 상품기획 부사장이 마이크를 잡고 “지프의 브랜드 가치는 자유와 모험인데, 그 가치를 실현하는 브랜드의 전략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윌리스부터 시작된 오리지널 프리덤 머신에서 가졌던 그 핵심 가치를 보호하면서도 도달 범위를 확대해 가는 것이 핵심입니다”고 말했다.
모두(冒頭)부터 ‘윌리스’가 등장했다. 1941년 윌리스 오버랜드사가 만든 ‘윌리스 MB’를 말하는데, 이차의 별명이 지프였고, 오늘날 랭글러를 만드는 ‘지프’의 근간이 됐다.
나이퀴스트 부사장이 ‘윌리스’를 언급한 건 일종의 힌트였다. 뒤에 이어지는 디자인 해설은 사실상 어벤저에 녹아 든 윌리스의 DNA를 찾아내는 절차였다. 지프 라인업에서 윌리스의 원형을 가장 잘 계승하고 있는 모델이 랭글러라고 하면, 어벤저는 윌리스의 핵심 디자인 포인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모델이 되는 셈이다.
이제 마이크는 이탈리아 토리노로 넘어갔다.
지프 디자인 책임자인 다니엘레 칼로나치(Daniele Calonaci)가 스스로를 “유럽에서 어벤저 설계에 직접 참여한 디자이너입니다”라고 소개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윌리스 스토리’를 이어받았다.
“최초의 오리지널 모델 윌리스에 포함된 여러가지 디자인 요소들이 그 이후에 나오는 지프의 다른 모델들에 반영이 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윌리스가 저희의 DNA라고 할 수 있죠. 계속해서 윌리스의 박스형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는 것도 여러 이유가 있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박스 스타일이 공간 활용도가 높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박스형에서 확보된 실내 공간은 ‘민주적’으로 설계된다.
“실내 디자인 관련해서는 단순하게 디자인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유연성을 가져가기 위해 모듈형 디자인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계기반이나 라디오는 운전자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모든 탑승객이 볼 수 있도록 디자인했습니다. 저희는 이걸 ‘민주적’이라고 표현하고 싶은데요. 운전자뿐 아니라 보조석, 뒷자석에 앉은 모든 탑승자를 배려합니다.”
칼로나치가 언급한 ‘원칙’은 어벤저의 외/내관 디자인의 기본 틀이 됐다. 외형은 박스형이어야 하며, 내부는 단순하면서도 민주적이다. 칼로나치의 원칙은 실제 어벤저에 그대로 실천돼 있다.
이제부터는 어벤저에 숨은 윌리스 찾기다.
칼로나치는 “지프 라인업에서 가장 차제가 작은 어벤저는 아이코닉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쿨(Cool)하되 기술적이어야 하고, 패셔너블해야하는 동시에 콤팩트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젊음(Young)과 재미(Fun)를 주는 요소도 반영돼야 했습니다”고 서두를 열었다.
어벤저에 전승된 첫 번째 윌리스는 오프로드 DNA다.
디자이너들은 차체를 최소화하기 위해 가장 먼저 전면과 후면의 오버행을 줄였다.
그런데 칼로나치는 “타이어는 692mm의 공간을, 지상고는 꼭 200mm 이상을 달성하라는 요구가 있었습니다”고 했다. 다 이유가 있었다. 20도의 진입각과 20도의 여각, 그리고 32도의 이탈각을 달성하기 위해서다. 이 수치는 오프로드 성능을 확보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두 번째는 주행거리와 공간확보다. “WLTP 기준으로 400km 주행거리를 확보하도록 디자인하라”는 주문이 있었다고 한다. 상충하는 요구가 더 있었다. “차량의 내부 공간뿐만 아니라 트렁크 공간도 최대한 확보하라”는 요구였다.
칼로나치는 “차 측면에서 S라인의 곡선을 그리듯이 디자인했으며, 휠 하우스도 뒤집어진 (U)자 형태로 설계했습니다. 컴패스와 그랜드 체로키에도 이미 추가한 바 있는 플로팅 필러(floating Filler)도 어벤저에 적용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공간을 충분히 확보하면서도 오래 달리도록 하라는 요구를 공기역학적 디자인으로 극복했다는 설명이다.
세 번째는 그릴 디자인이다. ‘세븐 슬롯’은 지프의 성씨(姓氏)같은 아이콘 요소다. 이 그릴은 지프가 81년간 계속해서 유지해왔다.
그런데 어벤저는 전기차다. 전기차에서 그릴은 기능적으로는 퇴화될 운명이다. 그렇다고 81년간의 패밀리룩을 하루 아침에 버릴 수는 없다.
칼로나치는 “지프의 세븐 슬롯 그릴은 그 동안에도 상당히 많은 진화를 거쳤습니다. 어벤저에서도 큰 폭의 진화가 이뤄졌습니다. 윌리스는 그릴이 수직형인데, 어벤저와 같이 현대적인 모델에서는 수평적 그릴이 적용됐습니다. 요즘 차량은 라디에이터가 작아지고 위치도 하부에 들어가기 때문에 더 이상 수직형 그릴이 필요없어졌습니다”고 말했다. 전기차는 더더욱 필요 없지만 진화의 흔적으로, 지프의 상징으로 전면부에 변함없이 자리잡았다.
디자인 요소로는 고객 경험 측면에서 제 몫도 다하고 있었다. 칼로나치는 “덕분에 차체가 굉장히 콤팩트하면서도 견고한 모습을 유지할 수가 있었습니다”라고 했다.
네 번째는 ‘벌징(bulging)’과 보호기능이다.
벌징은 차체가 옆으로 좀 튀어나온다는 의미인데, 펜더를 옆으로 조금 튀어나오게 만들어서 차체를 보호할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야전을 누비던 윌리스는 다양한 보호 실드로 차량의 핵심적인 부품들을 보호할 필요가 있었다.
“안개등과 리플렉터는 직접 만질 수가 없습니다. 보호 실드가 있기 때문입니다. 외부 충격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도록 디자인했습니다”는 칼로나치는 “앞범퍼, 뒷범퍼 그리고 플레어 등 곳곳에 보호 패널을 장착을 했습니다. 덕분에 360도 바디 프로텍션이 가능합니다”라고 말했다.
덧붙여 “문을 열 때 차량 하부가 긁힐 수 있는데, 거기에도 저희가 보호 장치를 추가를 했기 때문에 걱정 없이 문을 여닫을 수가 있습니다”고 했다.
다섯 번째는 테일램프의 X자 제리캔 디자인이다.
X자는 연료통에 새겨진 표식이었다. 과거 윌리스는 따로 연료통을 가지고 다녔는데, 그 연료통에 X자 표식이 있었다.
칼로나치는 “그런 히스토리에서 디자인 모티브를 받아 리어 램프에 X자로 불빛이 들어오도록 했습니다”고 풀이했다. X자에는 카모플라주(군용 패턴), 즉 X-카모라고 하는 패턴도 들어가 있는데 이 또한 윌리스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제는 실내로 들어가 보자. 여전히 윌리스의 철학이 존재하지만 실내는 좀더 현대적이다.
실내의 수납공간에서는 재미 있는 비유가 등장한다. “탁구공을 채우면 580개가 들어가는 정도”의 수납공간이 차량 곳곳에 숨어 있다고 했다.
이를 수치로 환산하면 34리터 정도가 되는데, 보통 B-SUV 세그먼트 차량의 실내 수납 공간이 15리터가량이라고 한다. 어벤저가 두 배 이상의 수납공간을 확보했다고 엔지니어들은 자랑한다. 트렁크 적재공간은 2열까지 시트를 전부 폴딩하면 러버덕(고무오리) 2,442개가 들어갈 수 있고 한다. 트렁크만 측정한 적재공간은 355리터다.
이런 디자인 과정을 거쳐 탄생한 어벤저의 상품성은 어떻게 정의될 수 있을까?
지프 유럽의 상품기획 총괄 매니저인 마르코 몬테펠로소(Marco Montepeloso)가 이렇게 정리했다.
“어벤저의 가장 큰 도전과제는 지프가 갖고 있는 DNA를 작은 차체에 다 담아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요.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저희는 기능 지향적 디자인을 추구했습니다. 스타일만을 위해서 디자인을 하지는 않고 모든 스타일에 기능을 녹여 넣었습니다. 실용성을 저해하지 않으면서도 멋진 스타일의 디자인을 하는 것이 저희의 원칙이었습니다”라고 결론지었다. /100c@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