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리에게’ 신혜선, 집요한 카메라 시선 견디는 연기내공 ‘굿’ [김재동의 나무와 숲]
OSEN 김재동 기자
발행 2024.10.02 18: 30

[OSEN=김재동 객원기자] 언니만 있으면 행복하다던 아이였다. 졸업여행은 정말 가기 싫다던 아이였다. 억지로 보냈다. 그리고 동생은 돌아오지 않았다.
친구 없는 동생을 걱정했었다. 동생의 사회생활이 걱정됐던 것도 사실이다. 근데 단지 그 뿐이었을까? 그 아이의 애정이 치근덕으로 느껴져선 아녔을까? 그 대책없는 기댐이 부담스러웠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결국은 그 부담스런 동생을 버렸던 건 아닐까? 그 기이동 숲에다?
지니 TV 오리지널 드라마 ‘나의 해리에게’에서 신혜선이 맡은 두 배역 주은호와 주혜리의 연결고리가 공개됐다.

PPS방송국 아나운서 주은호(신혜선 분)는 실종된 동생 주혜리에 대해 깊은 슬픔과 죄책감을 안고 산다. 범죄 연관성이 없는 성인의 실종을 가출로 취급하는 현행법상에서 남겨진 사람들의 공통된 아픔을 주은호는 고백했다.
“타들어가. 매일 조금씩. 아주 새카맣게 타들어가. 그러니까 내 마음이 아주 새카맣게 타들어간다고. 걔가 죽었을 것 같아서.” 의지만으로는 역부족인 이 슬픔은 주은호를 행동하게 했다. 이젠 사회인이 되었을 동생 주혜리의 공간도 자기 집 바로 아래층에 만들어 주었다. 미디어N서울 주차장 시설 관리소도 찾았다. “제가 조금 이상한 부탁을 해도 될까요?”라며 정산소 직원을 자청했다.
“언니 꿈은 아나운서다. 언니랑 방송국에 함께 가면 좋겠다.” “주차장에서 일하면 정말 행복하겠다. 주차장은 나의 꿈.” 동생 혜리가 남긴 메모가 자극했다. 주은호의 꿈은 이루었으니 동생 혜리의 꿈도 이뤄주고 싶다는 심리가 발동했을 테다.
주차장 첫 출근길. 맞은편 부스의 김민영(오경화 분)이 이름을 물어올 때 “주은..아, 주혜리요.”라 답했다. 나이를 물어올 때도 “서..아니 스물 다섯.”이라 답했다. 그렇게 주차장에서만큼은 주혜리로 살기로 했다. 이때까지만해도 전적으로 주은호의 자의가 반영된 선택였다.
정산소 일을 마치면 아래층 동생의 공간에서 주혜리로 잠들고 새벽 4시가 되면 주은호로 돌아와 윗층 자기 공간에서 치장하고 출근하는 생활이 루틴이 되었다.
그렇게 탄생된 주혜리가 인격마저 점차 독자성을 갖게 된다. 아마도 결정적 계기는 주차장의 주혜리가 미디어N서울 강주연(강훈 분) 아나운서를 짝사랑하기 시작하면서부터로 추정된다. 이때 주은호는 모두에게 친절한 옛사랑 정현오(이진욱 분)와 헤어졌을 때다. 강주연은 반대로 불친절한 남자였다. 주은호의 바람이 주혜리에 투영되는 바람에 주혜리 눈에 강주연은 이상형이 되었던 것 같다.
어쨌거나 주혜리의 인격이 자리를 잡아갈수록 주은호는 주혜리의 시간에 대한 기억을 잃게 된다. 주은호가 정신상담을 받게 된 것도 그때부터다. “저 제가 얼마 전부터 기억이 나지 않는데요.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모르는 상처가 생기고 몸이 피곤하고..”
주은호가 주혜리의 시간을 잊는 동안 주혜리는 주은호의 일상을 꿈으로 지켜본다. ‘주은호’로 불리는 꿈 속의 자신은 많이 불안하고 불행해 보였다.
그랬던 주은호가 어느 날부터 꿈에서 사라졌다. 주혜리의 짝사랑을 강주연이 받아들이면서부터, 둘의 연애가 시작되면서부터로 추정된다. 주혜리라서 너무 행복한 시간이 꿈 속의 주은호를 삭제시켰다.
주혜리가 행복한 동안 주은호는 최악의 시간을 보냈다. VCR 단독을 노리고 죽을 고생하며 현장을 뛰었더니 동료 아나운서들은 합평회란 미명하에 인민재판을 벌였다. 까마득한 후배 심진화(김태린 분)로부터는 ‘창피하다’며 사과도 요구받았다. ‘창피하다’는 말은 옛 연인 정현오에게도 들었었다.
당시 정현오는 ‘너무 별로인 주은호와 왜 사귀었냐?’는 질문을 들을 때마다 창피했었다고 말했었다. 그때 주은호는 대꾸했었다. “근데 내가 좀 별로이면 안되나? 더 이상 너한테 미안하지 않아. 내가 별로인 건 전혀 내 의지가 아니니까.”
그런 주은호의 신경에 계속 거슬리는 이름이 있다. 미디어N서울 아나운서 강주연. 블랙아웃 상태에서 깨어난 낯선 집의 주인. 주은호는 강주연을 만나기로 작정하고 미디어N서울을 찾았다. 그리고 사원증 사진 속 강주연이 자신을 보며 미소 짓는다. “아, 혜리씨구나!”(이 대사에서 제작진은 살짝 에코를 가미했다.) 그리고 동시에 부르는 정현오의 외침 “주은호!”
어쩐지 난감한 상황 속에서 주은호는 이유도 자각하지 못한 채 화장실로 도망쳤고 화장실 거울을 깨며 쓰러진다. 깨어난 곳은 의무실. 주혜리는 자신이 30만원 훌쩍 넘는 거울을 깨버린 사실을 기억하지 못해 당황해 한다.
주은호는 왜 거울을 깼을까? 혹시 주혜리의 기억이 뇌세포를 습격하는 혼란 속에서 거울 속에 비친 주은호의 모습이 너무 혐오스럽게 보였던 것은 아닐까?
일주일에 하루 오후 5시 40분 정신과 상담시간은 더 이상 주은호의 시간이 아니었다. 오후 4시부터는 주혜리가 활동하는 시간. 주혜리의 인격이 시나브로 자리를 잡아가며 상담자는 주은호에서 주혜리로 바뀌었다.
이미 주은호와 한 몸이라는 얘기를 들은 주혜리는 걱정된다. “은호와 혜리의 연결고리를 알아내면, 증상이 나아지면, 그때 저 주혜리는 어떻게 되는 건대요? 사라지나요? 없어지나요?” 의사가 안심시키려 하지만 강주연과의 행복한 시간이 사라질까 두렵다. “저는 혜리예요. 은호씨는 꿈속에서만 봤어요. 근데 지금은 꿈도 안꿔요. 저는 이제 행복해졌어요. 사랑하게 됐으니까요. 저는 혜리를 버릴 수 없어요. 지금의 저는 꿈속의 은호씨보다 훨씬 행복하니까요.”
행복한 몸을 주은호한테 뺏길 순 없었던 주혜리는 은호에게 편지를 쓴다.“안녕하세요. 은호씨... 꿈속의 은호씨는 불행해 보였어요. 지금 나는 많이 행복해요. 이 몸의 주인이 당신이라고 하더라도 나에게 조금 양보해 주시길. 내게서 나를 뺏어가지 않기를...”
주은호는 불행하다. 아나운서란 그럴듯한 허울은 쓰고 있지만 동생을 잃었고 연인도 잃었으며 그녀를 둘러싼 세상은 그녀를 별로라고 평한다. “근데 내가 좀 별로이면 안되나?” 세상에 대해 반문하지만 정작 그 사실을 제 스스로는 뼈아프게 인지하고 부정하고 싶어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불행을 부정한다.
주혜리는 행복하다. 주차장 정산소에서 일하지만 좋아하는 남자를 구하기 위해 누군가의 머리에 박스를 뒤집어 씌울 수 있고 성추행범을 참교육 시킬 수도 있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주연모를 위로할 수도 있고 형 인생 대신 사느라 세상이 지루한 강주연을 웃게도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자신이 행복함을 뼛속까지 자각하고 있다.
이 두 캐릭터를 감당하다 보니 신혜선을 비추는 클로즈업씬이 많다. 그 부담스런 카메라의 오랜 시선을 견뎌내는 신혜선의 연기가 놀랍다.
/zaitung@osen.co.kr

Copyright ⓒ OSEN.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