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도 두산에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프로야구 KT 위즈로 이적한 내야수 허경민(34)은 두산 베어스 소속이었던 지난 7월24일 잠실 키움전을 마친 뒤 단상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시 두산이 침체에 빠지자 일부 팬들이 잠실구장 앞에서 트럭 시위를 하는 등 분위기가 뒤숭숭할 때였다. 시즌 후 FA 자격을 얻는 허경민이 팬들을 달래기 위해서 한 말이었는데 지키지 못한 약속이 되어버렸다.
허경민은 8일 KT와 4년 최대 40억원에 FA 계약했다. 계약금 16억원, 연봉 총액 18억원, 옵션 6억원으로 총액 40억원을 맞췄다. 두산에 남았을 때 3년 20억원보다 기간을 1년 더 늘리며 총액은 두 배로 높였다. 옵트 아웃으로 FA 신청한 것이 대성공이다.
다만 두산팬들과 지키지 못한 약속 때문에 떠나는 발걸음이 가볍지는 않다. KT와 계약 후에도 허경민은 “10년 이상 몸담았던 팀을 떠난다는 것은 정말 힘든 결정이었다. 그동안 응원해주신 두산 팬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프로 선수로서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플레이로 팬들에게 보답하겠다”고 작별 인사를 했다.
2009년 두산에 입단한 허경민은 올해까지 16년 원클럽맨으로 활약했다. 2020년 시즌을 마친 뒤 처음 FA 자격을 얻었지만 4+3년 85억원 조건에 남았다. 4년 65억원 계약이 끝난 뒤 3년 20억원 계약 실행권을 선수가 갖는 플레이어 옵션으로 넣었다. 그때만 해도 영원한 두산맨으로 남을 줄 알았지만 프로 세계에 영원한 것은 없었다.
허경민은 선수 옵션을 써서 이번 FA 시장에 나왔다. 3년 20억원이라는 보장된 조건을 포기한 모험이었다. 각 팀마다 주전 3루수들이 꽉 차 있는 상황에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허경민 측에선 급변하는 시장 분위기를 빠르게 감지했다.
시발점은 한화였다. 한화는 지난 여름부터 KT 주전 유격수 심우준에게 큰 관심을 보였고, 트레이드로 영입을 시도하기도 했다. KT 역시 심우준을 쉽게 내줄 수 없었고, FA 협상에서 예상보다 높은 조건을 제시했지만 4년 50억원을 베팅한 한화를 이길 수 없었다.
KT는 빠르게 플랜B를 가동해 허경민으로 방향을 틀었다. 당분간 윈나우 모드로 승부를 봐야 할 KT에 허경민은 내야 전체 유동성 더해줄 수 있는 즉시 전력 카드였다. 반면 야수진에 고액 연봉 베테랑들이 많은 두산은 세대 교체가 필요한 시기였고, 허경민에게 KT 이상의 베팅을 할 순 없었다.
이로써 두산은 또 한 명의 프랜차이즈 스타와 작별을 하게 됐다. 왕조 시대의 서막을 알린 2015년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 중 김현수, 민병헌, 양의지, 오재일, 최주환, 박건우 등 주축 선수들이 좋은 대우를 받고 FA로 팀을 떠났다. 양의지는 FA로 다시 돌아왔지만 허경민이 2차 FA로 팀을 떠나며 작별을 고했다.
역대 KBO리그 FA 시장에서 팀의 상징과 같은 프랜차이즈 스타의 이적은 심심찮게 일어났다. 1999년 시즌 후 처음 열린 FA 시장에서 해태 에이스 이강철과 LG 포수 김동수가 나란히 삼성으로 이적하며 충격을 줬다. 2004년 시즌 후에는 LG 신바람 야구의 주역이었던 김재현이 SK로 떠났고, 2007년 시즌 뒤에는 두산 에이스 박명환이 옆집 LG로 이적했다.
2011년 시즌을 앞두고 일본에서 돌아온 이범호는 한화가 아닌 KIA로 갔고, SK 왕조 주역이었던 정근우는 2013년 시즌이 끝난 뒤 한화로 팀을 옮겼다. 2014년 시즌이 끝나고선 삼성 우승을 위해 팔꿈치를 바쳤던 ‘푸른 피의 에이스’ 배영수가 한화로 이적했고, 삼성 왕조의 핵심이었던 박석민도 2016년이 종료된 뒤 NC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가장 큰 FA 충격은 2017년 시즌 뒤에 있었다. 롯데의 간판이었던 포수 강민호가 삼성으로 깜짝 이적하면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롯데는 2021년 시즌 후에도 간판 외야수 손아섭의 NC 이적을 지켜봐야 했다. 같은 시기 NC 창단 멤버로 첫 우승도 이끌며 영구 결번감으로 불린 나성범도 2021년 시즌 뒤 고향팀 KIA로 이적했다.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 같은 프랜차이즈 선수도 언제 어떻게 움직일지 모르는 게 FA 시장의 논리다. /waw@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