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메이저리그 출신 용병이라는 훈장을 가슴에 달고 당당히 한화의 2010 시즌 개막전 선발로 마운드에 오른 호세 카페얀(29)의 투구는 195cm, 105kg의 거구에서 풍겨 나오는 듬직함만큼이나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결과는 7이닝 3실점의 QS(Quility Start) 패.
지난해 KIA에 우승컵을 내주기는 했지만 여전히 국내 최고의 팀으로 자타가 인정하는 SK를 상대로 거둔 성적이었기에 카페얀의 선발 패전기록은 그다지 마음 쓰지 않아도 좋을 듯 싶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카페얀의 투구는 개막전을 정점으로 곧바로 내리막 길로 접어들었다. 등판했던 총 13경기 중 12경기를 선발로 나섰던 카페얀의 현재(6월 10일 기준) 성적은 0승 10패. 평균 자책점은 무려 8.73이나 된다.

하지만 표로 나타난 기록보다도 더욱 염려스러운 부분은 시즌 초에 비해 갈수록 버텨내는 이닝이 점점 짧아지고 있는 점이다. 12번의 선발등판 중에서 5회를 채우지 못하고 강판 당한 횟수가 무려 7번. 그런데 그 대부분이 5월 이후에 집중적으로 몰려있다.
카페얀은 한계에 봉착한 것일까? 그의 투구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심판원이나 투수코치의 말을 빌자면 카페얀이 던져대는 공 하나하나의 위력은 결코 나쁜 편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 부진의 원인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주변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승부처에서의 제구력 난조와 수비에서의 섬세함 부족이 가장 큰 이유였다. 좀더 부연하자면 초반 등판했던 몇 경기에서 승운이 따라주지 않았던 것이 나쁜 영향을 미쳤는지, 좋은 구위를 갖고 있으면서도 심리적인 컨트롤 면에서 애를 먹고 있어 보이는 부분이 부진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추측되었다.
프로출범 이후 지금까지 선발전문으로 승수 없이 패전만 두 자릿수를 기록한 투수는 카페얀이 사실상 처음이다. 1999년 쌍방울의 가내영이 무승 10패를 기록한 적이 있긴 하지만 그 해 가내영이 선발로 등판한 경기는 총 57경기 중에서 겨우 6경기 뿐이었다.
선발전문 기록으로 1986년 빙그레의 장명부(22경기 중 17경기 선발등판)가 개막 이후 승리 하나 없이 내리 15연패를 내달린 기억이 있지만, 그 해 8월 특급 투수 최동원(롯데)을 맞상대로 서러운(?) 1승을 건져 무승 전패의 치욕적인 기록을 간신히 모면한 바 있다. 장명부의 최종 성적은 1승 18패였다.
그리고 20년 후, 두산의 김명제(41경기 중 9경기 선발등판)도 2006년 9월 하순까지 승수와 전혀 인연을 맺지 못하며 무승 11패라는 참담한 기록으로 코너에 몰렸다가 시즌 폐막을 불과 열흘 앞둔 9월 23일에 가서야 간신히 첫 승(LG전)을 따내는 진땀나는 경험을 했다.(이후 내리 3연승으로 시즌을 마무리)
이 밖에도 1982년 삼미의 감사용(41경기 중 16경기 선발등판)이 기록한 1승 14패와 1993년 쌍방울의 성영재(24경기 중 15경기 선발등판)의 1승 13패도 천금 같은 1승 덕분에 무승 전패의 치욕을 모면한 경우로 역사에 새겨져 있다.
현재 8개 구단의 투수들 중, 시즌 총 투구수 1000개를 상회하고 있는 선수들은 구단 평균 2, 3명 정도로 합치면 대략 20명 정도가 된다. 물론 전원 선발 투수들이다. 이 중에는 카페얀의 이름도 들어있다. 카페얀이 지금까지 던진 총 투구수는 1092개. 투구수만 놓고 보면 자신의 몫은 그런대로 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게 하는 수치다.
2004년부터 2008년까지 애틀랜타-밀워키-콜로라도를 전전하며 메이저리그를 주무대로 100경기 가까이 마운드를 들락거렸던 카페얀의 MLB 통산 성적은 5승 7패. 투구이닝은 100이닝을 약간 상회(123이닝)하는 정도로 그다지 많지는 않았지만 평균자책점은 4점대(4.89)를 유지했을 만큼 그럭저럭 내용이 있는 선수였다.
그런데 머나먼 타국 땅 이곳 한국에서는 신세가 말이 아니다. 시즌이 개막되기 전까지만 해도 팀내 에이스 류현진과 더불어 한 시즌 두 자릿수 승수는 충분히 올려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던 카페얀이었는데 엉뚱하게도 승수가 아닌 패수 쪽으로 화살표가 돌아가고 말았다.
앞으로 카페얀의 무승가도 질주가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혹자는 우스갯소리로 류현진의 20승과 카페얀의 20패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빠를까라고 비꼬기도 하지만, 카페얀에게는 보장된 내일이 없다. 두산의 왈론드나 LG의 더마트레 등과 같이 빠른 시일 안에 이미지 변신의 전기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20패가 아니라 15패도 기다려주기 어려운 상황에 몰려있다.
6월 11일, 카페얀은 팀 순위는 아래쪽이지만 타선 만큼은 어느 팀보다도 강력한 응집력과 폭발력을 자랑하는 롯데를 상대로 마산구장에서 시즌 13번째 선발등판을 감행한다. 롯데를 상대로 한 투구는 올 시즌 처음이다. 아직 만난적이 없다.
경기가 끝났을 때 카페얀의 성적표는 어디가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 1승 10패? 아니면 무승 11패?
레일이 잘려나간 절벽이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의 위험한 질주가 멈출 날은 과연 언제쯤일지. 아울러 그 멈춤이 질주 끝의 추락에 의해서일지 아니면 스스로의 제동에 의해서일지 자못 궁금증을 더해가는 여름이다.
윤병웅 KBO 기록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