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연기요? 저 표정 마구 구겼고, 콧물 분장도 했어요. 장난 아니죠? 그런데 생각해 보면 바본데 망가지는 건 어쩔 수 없잖아요.”
배우 김수현은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이하 은위대, 장철수 감독)를 통해 더 이상은 없을 만큼 마음껏 망가진 경험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 했다. 길거리에 대변을 보다 짝사랑하는 여인에게 들키고, 꼬마들에게 얻어맞다 여성 속옷을 착용한 채 거리를 활보하는 게 극중 그가 연기한 덜떨어진 동네 바보 동구 캐릭터. “솔직히 광고주의 얼굴이 떠올랐다”며 장난스레 웃지만, 김수현의 이 같은 태도는 영화 속 죽어라 망가져도 거부할 수 없는 그의 매력적인 백치미소를 통해 염려를 붙들어 매도록 만든다.
내달 5일 개봉을 앞둔 ‘은위대’의 주연배우 김수현을 최근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은위대’는 북한 최고 엘리트 요원 원류환이 조국통일의 사명을 안고 남파된 후 서울의 한 달동네에서 지령을 기다리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 김수현은 영화에서 동네 바보 동구로 위장한 최고 요원 원류환 역을 맡아 극 전반부와 후반부 캐릭터의 양극단을 오간다. 한 인물이지만 간극이 심해 1인2역을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영화 ‘7번방의 선물’에서 류승룡 선배도 바보 역할을 하셨잖아요. 작품이 워낙 잘 됐고 캐릭터도 유명해져서 솔직히 비교당하면 어떡하나 싶었어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동구와 류승룡 선배가 연기한 인물은 개별로 아픔이 있으니 다를 수밖에 없어요. 부담감은 떨쳐 버렸어요.”
롤모델 없이 바보 캐릭터를 연기했지만 참고한 캐릭터는 있다.
“감독님께 편하고 부담 없는 바보를 만들자고 제안했어요. 그렇게 힘 뺀 인물을 대본 리딩 때부터 보여드렸고, 다행히 의견이 수용됐죠. 감독님께는 말씀 안 드렸는데 사실 바보 캐릭터를 따온 건 BBC 유명 캐릭터 텔레토비예요. 바보가 옆에서 바보스러운 행동을 하면 사실 부담스럽거든요. 그런데 왜 텔레토비가 옆에 있으면 특유의 행동을 해도 그런 느낌을 받지 않잖아요. 동구도 텔레토비처럼 동네사람들에게 그렇게 받아들여져야 하는 인물이었어요.”
바보 캐릭터에 대한 비교 외에도 원작의 유명세 또한 김수현이 안고 가야 할 숙제였다. 동명의 원작 웹툰은 누적 조회수 2억 뷰를 돌파하고 탄탄한 마니아층까지 거느린 웹툰계의 대작. 그러다보니 영화에 대한 기대치는 저절로 높아졌고, 잘못하다간 비난세례가 날아들지도 모른다.
“부담감이 대단했어요. 그 정도 클릭수면 마니아층이 있을 테니 역할 소화 제대로 못하면 난리가 나겠구나 싶었죠. 캐릭터 분석을 했는데 사실 정답은 웹툰에 있잖아요. 도움 많이 받았고 부담스러워하고 겁냈던 심정에서 생각을 조금씩 바꾸기 시작했어요. 잘만 소화한다면 그 클릭수가 관객이 되고, 또 그들이 제 팬이 될 수 있겠다로 마음을 고쳐먹은 거죠. 자신감과 믿음이 한 쪽에서, 그리고 긴장감이 다른 쪽에서 팽팽하게 저를 당겼는데 오히려 괜찮더라고요. 원작 조회수가 어마어마하다고 하던데 관객수가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요.”
첫 스크린 주연작에 인기 웹툰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부담감이 컸지만 현장은 즐거웠다. 그와 함께 남파간첩 3인방으로 출연하는 배우 박기웅, 이현우와 죽이 잘 맞는 삼형제로 현장을 떠들썩하게 누볐기 때문.
“우리 세 사람은 이번 ‘은위대’를 통해 처음 만났어요. 남자들끼리는 잘 모르는 상태에서 사실 기 싸움 같은 걸 하거든요. 수컷본능인데 그것 때문에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다행히 맏형인 기웅이 형이 잘해보자고 먼저 손을 내밀었어요. 둘째인 나도 아니고 막내 현우에게 ‘형이 잘 할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우리 세 사람 사이에 당겨져 있던 긴장의 끈이 풀릴 수 있었어요.”
극중에선 류환과 해진(이현우 분) 사이의 미묘한 스파크가 튀기도 한다. 북에서 훈련받던 시절 전설의 조장으로 유명세를 떨친 류환을 해진이 동경해마지 않으며 설레 하는 씬은 관객을 빵 터지게 만들 대목으로 점쳐지고 있다.
“그 장면은 원작에도 등장해요. 영화에서 보니까 동경의 감정을 미묘하게 잘 끄집어냈더라고요. 현장에서 촬영할 땐 아무래도 둘 다 남자다 보니까 감독님께 ‘얘랑 백허그 해요?’ 하면서 장난을 쳤던 것 같아요. 하면서 재밌었고 솔직히 말하면 미묘한 감정보다는 괴롭히는 느낌이었어요.”
영화초반 바보 캐릭터로 동네를 굴러다니던 동구는 후반부 확 달라진 모습으로 변신한다. 북에서 내려온 특수부대원들을 상대로 뼈가 꺾이고 고개가 돌아가는 대결을 펼치며 최정예 요원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때문. 이를 연기하기 위해 김수현 역시 액션연습에 몸을 던졌다.
“액션감독님이 화끈한 분이라서 배우들이 대역을 쓰지 않고 액션씬을 직접 소화하길 바라셨어요. 대역 쓰면 오히려 본인이 만족하지 못 할 거라고 말씀하셨죠.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손현주 선배님과 제가 치고받고 싸우는데 그 장면 촬영이 대단했어요. 아마 한동안은 액션물 안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육체적 고통이 심했으니까요.”
슬랩스틱 몸개그에 격렬한 액션, 그리고 북한 최정예 간첩이 남한생활을 하며 겪는 요동치는 심리까지 김수현은 이번 ‘은위대’를 통해 다양한 숙제를 끌어안고 스크린 주연 배우 신고식을 톡톡히 치렀다.
“아쉬운 점이 눈에 너무 많이 보여요. 소화해야 할 것들이 많다고 느껴서 그랬는데 ‘내가 사투리를 저렇게 했어?’ 싶은 장면도 눈에 들어오고, 액션씬에서도 부족함이 느껴져요. 특히 아쉬운 건 감정연기고요. 영화 뒷부분에 등장하는 아파트 옥상씬은 비를 맞으면서 촬영한건데 계절이 겨울이다 보니 김이 날까봐 뜨거운 물을 뿌릴 수가 없어서 찬물을 맞아가면서 촬영했어요. 그랬더니 몸이 마음 같지가 않아서 굳고 얼어버려 신경을 자꾸 빼앗긴 것 같아요.”
지난해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의 폭발적인 인기 이후 김수현에게 ‘은위대’는 컴백작이나 다름이 없다. 그 사이 영화 ‘도둑들’이 있었지만, 당시 역할은 지금의 주역과는 비교가 되질 않는다.
“책임감과 부담이 컸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겁이 많아졌고 조심하다보니 사람이 작아지는구나 싶어서 걱정스럽더라고요. 당시에는 아무 것도 못 할 것 같기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도둑들’을 촬영하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이제까지 한 번도 같은 역할 없이 계속 다른 캐릭터를 연기했으니 조금 부족하고 실패해도 괜찮아 라는 마음이 생겼거든요. 아직까지 저는 도전자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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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한 기자 dreamer@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