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발 없다는 LG의 아우성과 정찬헌의 6번째 QS
OSEN 백종인 기자
발행 2023.06.22 12: 00

[OSEN=백종인 객원기자] 석 달 전이다. 독립구단 성남 맥파이스에 낯익은 투수가 등장한다. 정찬헌(33)이다. 한때 KBO를 씹어 먹던 파이어볼러 아닌가. 통산 성적도 상당하다. 선발, 마무리로 389게임(48승 46세이브)이나 등판했다. 그럼 뭐 하나. 당시는 무직 신분이다. FA를 신청했지만 받아주는 데가 없었다. 3월 말까지 갑갑한 상황이 이어졌다. 그 나이에 ‘미아’라는 꼬리표마저 붙었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 마지막 끈을 놓지 않았다. 그때 심정을 이렇게 기억한다. “뛰면서도, 공을 던지면서도. 문득문득 현타가 왔다. ‘내가 정말 이렇게까지 하는 게 맞나?’ ‘지금 왜 던지고 있는 거지?’ 같은 마음이 들었다.”
안 되겠다. 햇볕을 보고 던져야겠다. 생각을 바꿨다. LG 때 동료 이희성에게 도움을 청했다. 맥파이스에서 투수코치를 맡고 있었다. 그곳 신경식 감독이 흔쾌히 합류를 허락했다. 독립야구단 투수로 등록했다.
첫 등판 때다. 불펜도 따로 없는 환경이다. 평지에서 몸을 풀고 올라갔다. 마운드도 프로와는 다르다. 발 디딜 곳은 이미 움푹 파였다. 밸런스도, 영점도 잡힐 리 없다. 에라, 모르겠다. 있는 힘껏 초구를 꽂았다. 곧바로 “빡” 하는 파열음이 들린다. 빨랫줄 같은 타구가 외야로 뻗는다. 안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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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21일) 대구 삼성전이다. 그의 9번째 등판이다. 3회가 조금 불안했을 뿐이다. 1사 2, 3루의 위기를 잘 벗어났다. 삼진(김지찬)과 내야땅볼(김현준)로 간단히 처리했다. 이후 순항을 거듭한다. 7회까지 6안타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4사구 하나 없는 깔끔한 내용이다.
눈여겨 볼 부분이 있다. 이닝 수다. 7회를 채운 건 3년 만이다. 트윈스 시절인 2020년 6월 27일 (SK전 9이닝 완봉승) 이후 처음이다. 투구 수(77개)를 아낀 덕에 가능했다. 반면 아쉬움도 남을 법하다. 승리 요건도 아니고, 0-0에서 내려왔다. 흔히 말하는 매덕스 게임(100구 이하 완투)도 가능했다.
“구위가 뛰어난 스타일도 아니고 맞춰 잡는 유형의 투수 아닌가. 한 바퀴 더 돌면 그만큼 타자들이 적응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 그런 부분은 코칭스태프의 뜻과 다르지 않다. 지금 팀이 중위권으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도움이 되는 방향이 맞다고 생각한다.” (정찬헌의 경기 후 소감)
포심 패스트볼은 이제 별로 쓰지 않는다. 대신 투심, 슬라이더, 포크, 커브로 현란함을 강조한다. 강약 조절, 로케이션, 타이밍 싸움…. 그런 것들이 진짜 경쟁력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덕분이다.
그러고 보니 (그렉) 매덕스와 추구하는 바가 비슷하다. 삼진에 시큰둥하고, 효율성을 강조하는 점이 그렇다. “삼진? 좋지. 그런데 그거 잡으려면 3개나 던져야 하잖아. 잘하면 공 1개로 아웃 2개를 시킬 수도 있는데.” 그런 마 교수의 논리다.
정찬헌의 얘기도 다르지 않다. “가급적 타자들이 많이 치도록 유도한다. 빗맞은 안타도 나올 수 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그보다는 수비를 믿고 던지려고 한다.” 그래서 이닝당 삼진율은 0.50(49.2이닝 25K)에 불과하다. 대신 볼넷은 6개 밖에 주지 않았다. 흔히, 볼삼비로 불리는 K/BB 비율이 4.17이다. (보통 3.0 이상이면 A급으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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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 계약이 안 돼) 3월로 넘어가면서 상황이 더 어려워졌다. 집사람에게 말도 못 하고 혼자 끙끙 앓았다. ‘직장에서 갑자기 잘린 뒤, 가족에게 말도 못 하고 정장 차림으로 공원 벤치에 앉아있는 심정이 이런 거구나’ 하는 걸 그때 알았다.”
그런 시간이 계속됐다. 그러던 중이다. 서울에도 벚꽃이 피기 시작했다. 그 무렵이다. 오피셜 하나가 떴다. 발신지는 히어로즈였다. 개막 닷새 전이다.
내용이 특별했다. 프로팀 계약이 이럴 수도 있구나. 감동마저 느껴진다. 선수 측 요구가 너무 적다고 구단이 조정한다. 제시액의 두 배 가까운 역제안이 나온다. 2년 총액 8억 6000만 원의 계약서가 작성됐다. 고형욱 단장은 “정찬헌이라는 투수의 가치에 맞는 수준으로 맞추기 위해서 조정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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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경엽 트윈스 감독이 또 지략을 발휘했다. 이정용을 선발로 전환시킨다는 구상이다. 오는 25일 자이언츠전이 데뷔 첫 무대로 예정됐다. 8회 프라이머리 셋업에서 비상시에는 마무리까지 맡았던 불펜의 핵심 요원이다. 부진이 계속되자 변화를 시도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아울러 녹록지 않은 상황도 엿보인다. 애덤 플럿코, 케이시 켈리, 임찬규를 제외하고는 4, 5번 선발이 마땅치 않다. 우선 김윤식, 이민호가 기대치에 못 미친다. 전역한 이상영도 마찬가지다. 염 감독 자신이 “한 달 정도는 기회를 줄 것”이라고 했지만, 2경기 만에 엔트리에서 말소됐다. 그러다 보니 시즌 도중 불펜 전문을 전업시키는 조치까지 내리게 됐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트윈스 팬들과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진작에 정찬헌을 잡았으면…’ 하는 얘기가 나온다. 당연하다. (FA 때) 의사만 있으면 다른 팀도 충분히 데려갈 수 있는 조건들이 마련됐기 때문이다.
전 소속팀 LG도 그중 하나였을 것이다. 2021년 7월, 트레이드로 내보낼 때의 그 미안하고 안타까운 표정과 멘트들이 기억에 생생한 탓이다. 물론 비즈니스는 냉정하다. 이제는 엎질러진 물이고, 떠나간 버스다.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겠나.
그래도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정찬헌은 올해 겨우 1승(4패) 뿐이다. 그러나 9번 등판 중 6번이 퀄리티 스타트다. 이 정도면 플럿코(11회) 켈리(8회) 다음이다. 임찬규(4회)보다 오히려 낫다. 김윤식(2회)이나 다른 투수는 비교하기도 안쓰럽다. 등판 간격도 5~6일이다.
한 커뮤니티에 남겨진 댓글이다. “맨날 선발 없다고 아우성이면서….” 지켜보는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한 마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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