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원이 나뒹굴었다 “총재님, 이런 데서 던져야 하나요?”
OSEN 백종인 기자
발행 2023.07.05 09: 30

[OSEN=백종인 객원기자] 어제(4일) 포항 경기다. 라이온즈와 베어스가 만났다. 3-3으로 팽팽하던 8회 말이다. 2사 1루에서 홈 팀이 먼저 타임을 건다. 대타 오재일 투입이다. 그러자 베어스도 맞불을 놓는다. 이승엽 감독의 투수 교체다. 불펜의 핵심 정철원을 투입한다.
비장함이 불꽃을 튀기던 그때다. 낯선 장면이 포착된다. 투수가 마운드에서 나뒹구는 모습이다. TV 중계에는 잡히지 않았다. 아마 광고 시간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한 관중이 찍은 동영상이 여러 커뮤니티를 돌았다. 정철원 본인에게도 전해진 것 같다. SNS를 통해 이를 공개했다.
영상에 담긴 것은 교체 직후다. 정철원이 올라와 연습 투구 중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마운드에서 쓰러진다. 그냥 가볍게 넘어지는 정도가 아니다. 아예 한 바퀴를 크게 돌며 나뒹구는 모습이다. 디딤발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다행히 큰 이상은 없었고, 게임은 속행됐다. 하지만 자칫 부상을 당할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정철원의 SNS에는 걱정스러운 댓글들이 달렸다. ‘진짜 위험했네’ ‘마운드 관리 저 따위로 하고 시합하라고 부르다니’ ‘저게 야구장이냐’. 그런 분노의 목소리들이다.
정철원 인스타그램
앞선 7회였다. 홈팀 투수의 시정 요청도 있었다. (좌) 이승현이 심판에게 불편함을 호소한다. 그러자 그라운드 키퍼(구장 관리인)들이 달려 나온다. 부랴부랴 흙을 뿌린다. 임시방편이다. 이 장면을 본 한 네티즌이 이렇게 지적한다. (사실관계는 따져봐야 하겠지만, 이 분야에 상당한 조예를 보이는 의견이다.)
“마운드가 극단적으로 젖었을 때는 코어 흙인 마운드 클레이를 일정 부분 이상 걷어내고 새로 깔아서 다지고 컨디셔너로 마무리해야 되는데 냅다 컨디셔너만 부어버리고 끝...컨디셔너 두터우면 메인 코어 흙인 마운드 클레이에 스파이크 안 박혀서 미끄럽다고 발 딛는 곳에 컨디셔너 최대한 얇게 깔아달라고 하는게 투수들입니다. (중략) 대형 부상 안 당한 게 다행.” (MLBPARK 아이디 grou****)
SBS Sports 중계화면
지난달 중순이다. MLB 사무국의 대형 프로젝트가 진행됐다. 시카고 컵스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벌인 런던 시리즈다. 실제 치러진 것은 단 2경기다. 하지만 이를 위해 엄청난 스케일의 사전 작업이 이뤄졌다. 계획부터 시공까지 몇 개월이 걸린 일이다.
웨스트 햄의 홈인 런던 스타디움을 야구장을 개조하는 작업이다. 관중석 재배치는 차라리 쉬운 일이다. 그라운드 공사는 디테일의 끝을 보여준다. 메이저리그 레벨에 맞추기 위해서다. 잔디를 모두 걷어내고, 야구장에 맞는 품종으로 교체한다. 공이 튀는 반발력, 스파이크 신은 선수가 발에 느끼는 충격까지 모두 mlb 표준에 따라야 한다.
내야 쪽에는 유독 신경을 많이 쓴다. 달리고, 슬라이딩하고, 수비가 이뤄지는 곳이다. 베이스라인의 흙은 균일함, 안전성이 필수다. 홈 플레이트 부근(타석)도 손이 많이 가는 곳이다.
무엇보다 예민한 곳은 마운드다. 발을 내딛는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 비밀스러운 곳에서 채취한 진흙이 깔린다. 동부 델라웨어강 상류 어디쯤에서 가져온 특산품이다. 구체적인 위치는 업체에서도 극소수만이 알고 있다.
지난 2014년 다저스의 (호주) 시드니 시리즈 때도 비슷했다. 화물선 하나에 100개 넘는 컨테이너가 실렸다. 크리켓 경기장을 야구장으로 바꾸기 위한 자재들이다. 펜스 보호대, 경기/훈련용품, 보조 설비, 공인구 700개, 수건 700장, 옷걸이 2000개, 각 얼음 90만 개…. 온갖 시시콜콜한 것들이 포함됐다.
이 중 핵심은 역시 흙이다. 11개의 컨테이너에 담겨 소중하게 운반됐다. 델라웨어강에서 기차로 일주일간을 달려 샌디에이고 항구까지 옮겼다. 그리고 다시 화물선에 싣고 시드니 항구까지 나른 것이다. 단 2번의 경기를 위해서 말이다.
런던 스타디움 개조 작업 mlb.com
지난 2016년 7월의 일이다. 2회 초, 홈팀 투수가 타임을 건다. 역시 뭔가 내키지 않는 모습이다. 마운드 한쪽을 못마땅한 눈길로 쳐다본다. 심판들이 모인다. 구장 관리인도 4명이나 출동한다. 흙을 붓고, 고르고, 다지고…. 한동안 보토 작업이 계속된다.
하지만 민원인은 불만족이다. 땅을 밟아보더니, 급기야 관리인의 장비를 건네받는다. 그러고는 자신이 직접 작업을 마무리한다. 야구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다. ‘차우찬 삽질’ 사건이다. 당시에도 포항 구장이었다. 경기 전에 내린 비로 물러진 마운드가 문제였다.
물론 이해는 간다. 어쩔 수 없는 날씨 탓도 있으리라. 그럼에도 몇 번 없는 소중한 기회다. 연고지 인근 지역 팬들을 위한 값진 서비스다. 함부로 취소나 연기, 중단하기도 어렵다. 저변 확대는 중요한 이슈이고, 가치다. 그러나 기본적인 여건을 갖춰야 함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메이저리그 같은 블록버스터를 바라는 건 아니다. 적어도 안심하고 던지고, 달릴 수는 있어야 한다. 그래야 실력을 발휘하고, 최선을 다할 수 있다. 그게 KBO의 품질 관리이고, 포항 팬들을 위한 서비스다.
포항 야구장은 2012년 개장됐다. (당시 인구) 53만 시민의 염원이 결실을 맺었다. 특별한 사연도 있었다. 한 야구인의 조언이 전반적인 설계와 디자인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KBO 야구발전실행위원회 위원장이었던 허구연 씨였다.
외야 피크닉 존을 만들고, 포수 뒤편 본부석을 관중석으로 꾸몄다. 모든 좌석이 마운드를 향하게 했다. 허 위원장의 아이디어 덕분이다.
당시 그는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수많은 지자체를 다녔어도 내 말에 귀 기울여 주는 곳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포항시는 설계 공모작 선정부터 여러 부문에 대한 조언을 내게 부탁했다. 고맙게 생각한다”고 밝힌 바 있다.
2016년 마운드 흙을 직접 작업하고 있는 차우찬의 모습. MBC Sports+ 중계화면
그때의 조언자가 지금은 KBO 커미셔너로 재직 중이다. 설계하고, 짓고, 개장하면 끝나는 게 아니다. 그만큼 중요한 게 유지, 보수, 개선이다. 그래야 처음의 뜻이 이어지고, 의미가 지켜진다. 관리에 대한 책임은 홈팀 삼성 라이온즈 구단과 한국야구위원회의 몫이다.
멀쩡한 투수가 몸을 풀다가 넘어져 나뒹군다. 갑갑한 선수가 직접 삽을 들고 땅을 고른다. 그런 곳에서 공을 던져야 하는가. 그런 곳에서 야구가 계속돼야 하는가. 총재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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