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3막’ 연극 ‘라 로하’, 예상하지 못한 대단원으로 막 내려[최규섭의 청축탁축(清蹴濁蹴)]
OSEN 조남제 기자
발행 2023.08.22 08: 41

장장 8년간에 걸쳐 짜인 연극 ‘라 로하’(La Roja·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애칭)가 마침내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소설의 5단계, 곧 발단→ 전개→ 위기→ 절정→ 대단원으로 구성된 원작을 3막으로 완벽하게 연출한 한 편의 연극이었다. 베일을 걷고 마지막 한 점을 찍으며 환호성을 터뜨린 영광의 주인공은 예상을 깨고 스페인이었다. 다름 아니라, 제목 ‘라 로하’는 결말을 암시하고 있었던 복선이었다.
2023 호주-뉴질랜드 FIFA(국제축구연맹) 여자 월드컵은 극적 흥미가 돋보였던 무대였다. 표방했던 슬로건 ‘위대함을 넘어서(Beyond Greatness)’가 100% 반영된 결미(結尾)였다. 세계 여자 축구의 ‘엘리트 4’가 붕괴되고, 스페인이 새로운 ‘여제’로 등극했다.
이변으로 점철된 기묘(?)한 결말이었다. 이번 대회에서, 대회 최다(4회) 우승국으로 최초 3연패를 꿈꿨던 미국을 비롯해 정상 정복의 달콤함을 누렸던 독일(2회)-노르웨이-일본(이상 1회) 등 네 나라 가운데 그 누구도 4강에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절대 강자를 무너뜨리고 신흥 강호의 반열에 올라선 4강은 스페인을 필두로 잉글랜드-스웨덴-호주였다.

스페인의 우승은 그야말로 반전의 묘미를 듬뿍 안겼다. 그룹 스테이지에서 일본에 대패(0-4)했던 스페인이 정상을 밟으리라고 내다봤던 전문가와 팬은 과연 얼마나 됐을지 자못 궁금하다. 더구나 FIFA 표현대로라면, 지난해 ‘라 로하의 쿠데타’로까지 불릴 만큼 내홍을 겪지 않았던가. 극적 요소를 더욱 높이려는, 신이 짜 놓은 결말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8년이 걸려 3막으로 완성된 ‘라 로하’를 다시금 되돌아보고 싶은 까닭이기도 하다(표 참조).
제1막(발단→ 전개): 미미했던 첫걸음은 위대한 여정의 자양분
스페인의 FIFA 여자 월드컵 역사는 일천하다. 2015 캐나다 대회 때 비로소 첫 연(緣)을 맺었다. 본선 진출국이 늘어나면서(16→ 24), 월드컵 역사에 등장했다. 역시 월드컵 본선의 벽은 높았다. 우리나라에도 1-2로 졌다. 그룹 E 꼴찌(1무 2패)의 초라한 성적표를 안고 돌아섰다. 혹독하게 다가온 발단이었다.
4년 뒤, 전개는 복선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대반전의 대단원을 내다보지는 못했을 성싶다. 그룹 B 2위(1승 1무 1패)로 녹아웃 스테이지에 나갔다. 비록 결선 라운드 첫판인 16강전에서 미국에 1-2로 패퇴했어도, 무척 잘 싸웠다. 당대 으뜸의 전력을 구축했다고 평가받은 미국이었건만, 주눅 들지 않고 당차게 도전한 스페인의 기세에 혼쭐이 빠졌을 정도였다.
제2막(위기→ 절정): 고비를 딛고 대풍의 씨앗 뿌려
위기가 닥쳤다. 2022년 9월, 집단 항명 사태가 일어났다. 라 로하의 주축을 이루던 선수 15명이 호르헤 빌다 감독의 강압적 지도 방식에 반발하며 훈련을 거부했다. 루이스 루비알레스 스페인축구협회 회장이 이를 일축하고 빌다 감독 체제 고수를 선언하면서, 보이콧 파문은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빌다 감독은 12명을 국가대표팀에서 빼고 새 체제로 이번 월드컵에 출전해 정상에 오름으로써, 외형상 루비알레스 회장의 처방전이 옳았음을 입증한 셈이 됐다.
강경 대책으로 내홍을 극복한 라 로하는 ‘새 술’을 묘약으로 투입하며 등정 준비를 마쳤다. 그해 여자 U-20(8월) 월드컵과 U-17 월드컵(10월)의 잇따른 석권은 A대표팀의 강장제로 기능했다. U-17 월드컵은 2연패로서, 원활한 신진대사가 이뤄질 수 있는 바탕이 튼실함을 엿볼 수 있는 좋은 보기였다. 라 로하는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사진] 2002년 U-20 여자월드컵 시상식 ⓒGettyimages(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제3막(대단원): U-17·U-20·월드컵 우승 금자탑 세워
물론, 정상으로 가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이번 대회 개막 전, 세계 랭킹 6위인 스페인의 우승을 점친 전문가는 별로 없었다. 그룹 스테이지가 끝났을 때, 더욱 그런 분위기였다. 일본에 0-4로 완패한 점은 그런 전망을 부채질했다. 그러나 결선 라운드 첫판 스위스전은 자양제였다. 5-1로 대승하며 힘을 추스른 스페인의 기세는 폭발적이었다. 네덜란드(2-1 승)→ 스웨덴(2-1 승)은 물론 우승 0순위로 손꼽혔던 잉글랜드(1-0 승) 등 모두가 라 로하의 등정길에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아울러, 라 로하는 위대한 금자탑을 세웠다. 여자 축구 사상 두 번째로, U-17·U-20·월드컵 정상에 오르며 전성시대를 활짝 열어젖혔다. 첫 번째는 일본이 2018 프랑스 여자 U-20 월드컵에서 우승하며 완성한 바 있다. 또한, 남·여 월드컵 제패 국가 반열에도 올랐다. 독일에 이어 역시 두 번째다.
8년을 소요하며 만든 연극 ‘라 로하’는 2023 호주-뉴질랜드 여자 월드컵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무적함대’의 여자 편을 연출한 라 로하가 이제 어떤 연극으로 세계 축구계에 모습을 나타내 어떤 발자취를 그려갈지 앞날이 궁금하다.
전 베스트 일레븐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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