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청백적 응원은 계속된다..."너무 화나지만 경기는 또 보러 와야죠"
OSEN 고성환 기자
발행 2023.09.28 09: 11

"그래도 경기는 또 보러 와야죠. 이럴 때일수록 더 지지해야죠."
수원 삼성 팬들이 한(恨)에 가까운 분노를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뜨거운 응원은 멈추지 않을 전망이다.
지난 26일 오후 수원월드컵경기장을 방문했다. 수원 팬들이 '축구 수도'라 자랑해 마지않았던 빅버드를 분노로 가득 채웠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수원 팬들이 폭발한 이유는 충격적인 김병수 감독 경질과 염기훈 감독대행 선임이었다. 수원은 지난 26일 김병수 감독을 경질하고 플레잉 코치로 뛰던 염기훈에게 감독대행을 맡긴다고 발표했다. 수원은 "구단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타개하고 희망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라고 사령탑 교체 배경을 설명했다. 
그야말로 '특단의 조치'다. 수원은 현재 리그 최하위로 추락하며 강등 위기에 처해 있다. 지난 5월 김병수 감독이 이병근 감독과 최성용 감독대행의 뒤를 이어 소방수로 부임했지만, 반전은 없었다.
수원은 김병수 감독 체제 두 번째 경기였던 강원전 승리를 시작으로 5경기 무패(2승 3무)를 달리며 반등하는가 싶었으나 최근 연패에 빠지며 다시 12위가 됐다. 결국 김병수 감독은 어렵사리 수원 사령탑을 잡은 지 5개월 만에 지휘봉을 내려놓게 됐다.
[사진] 수원 삼성 제공.
[사진] 감독대행을 맡게 된 염기훈 /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놀라운 소식이다. 시즌 7경기를 남겨둔 중대한 기로에서 감독 경질은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물론 수원은 최근 최악의 경기력으로 연패에 빠지긴 했지만, 김병수 감독 부임 후 5경기 무패를 달리기도 하는 등 가능성도 보여줬기에 많은 팬들이 충격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그다음 행보가 분노를 샀다. 수원 최고의 레전드 염기훈에게 감독대행을 맡겼기 때문. 팬들은 프런트가 책임을 피하기 위해 애꿎은 염기훈을 방패막이로 내세웠다고 지적했다. 염기훈은 정식 지도자 경력이 사실상 전무한 만큼, 강등이 코앞으로 다가온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그에게 지휘봉을 맡기는 게 맞느냔 의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팬들은 직접 행동으로 분노를 표출했다. 수원월드컵경기장에 직접 근조 화환을 보내고 직접 경기장을 찾아 걸개를 걸고 포스트잇을 붙이는 등 행동에 나섰다. 구단 앞으로 배송된 근조 화환만 10개가 훌쩍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수원월드컵경기장 역시 팬들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수원 팬들은 구단 팬샵 외관에 포스트잇과 스케치북을 활용해 하고 싶은 말을 토해냈다. 대부분 프런트를 저격하는 문구 혹은 김병수 감독과 염기훈 감독대행을 향한 응원 메시지였다.
팬샵 옆에는 장례식장에서나 볼 수 있는 제상까지 차려져 있었다. 제기와 향, 과일은 물론이고 흰 국화 다발, "우리의 청춘과 낭만을 짓밟지 마라"라고 적힌 유니폼, 머플러도 찾아볼 수 있었다. 대표 응원 문구인 "SUWON till I Die."에서 'till'과 'I'에 가위표가 그어진 "SUWON Die." 걸개도 눈길을 끌었다.
수원 팬들이 어떤 심정으로 빅버드를 직접 찾았는지 그 마음도 들어볼 수 있었다. 꽃 한 송이를 두고 간 22년 차 수원 팬 홍승철(37) 씨는 "일찍 퇴근하고 오는 길에 들렀다"라며 "프런트가 김병수 감독에게 인간 대 인간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저질러 놓고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레전드를 앞에 세우고 그 뒤에 숨는 게 너무 싫어서 그렇게 썼다. 본인들은 왜 책임을 지지 않는지 모르겠다"라고 분통을 터트렸다.
홍 씨는 "곪다 곪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터진 것 같다. 나도 이런 일을 잘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나도 이렇게 경기 없는 날에 방문하게 만들었다. 팬분들이 곪았던 부분이 터진 게 아닌가 싶다"라고 덧붙였다.
염기훈 감독대행 이야기가 나오자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홍 씨는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어떻게 7경기밖에 안 남았는데...감독을 경질할 때는 다음 계획을 세워놔야 한다. 그런데 이번 염기훈 감독대행 선임은 팀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본인들이 어떻게든 뒤에 숨어보려는 행위로밖에 안 보인다. 염기훈은 이렇게 보내줘선 안 될 선수"라며 "만약 잘못돼서 팀이 2부로 떨어지면 또 레전드 한 명을 잃는 거다. 염기훈 선수도 그렇고 김병수 감독도 이렇게 보낼 사람들이 아니다"라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도 홍 씨는 다음에도 경기장을 찾아 응원을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경기는 또 보러 올 거다. 프런트가 아니라 수원이라는 팀을 응원하는 거다. 아마 응원하지 않는 게 바로 프런트가 원하던 일일 수도 있다. 그냥 관심을 꺼버리는 걸 바랄지도 모른다. 더 지지해야 한다"라고 힘줘 말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수원을 응원했다는 방모 씨(33) 역시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경기장까지 오게 됐다고 밝혔다. 고종수가 현역으로 뛰던 시절부터 수원 축구를 봤다는 그는 "너무 황당하다. 한 시즌에 감독을 이렇게 여러 번 바꾸는 게 맞나 싶다. 무엇보다 이렇게 대책 없이 감독대행을 선임한 것에 화가 난다. 그래서 나왔다. 그냥 화가 나서 나왔다"라며 울분을 삼켰다.
이어 방 씨는 "가장 답답한 부분은 작년에 오현규 선수 덕분에 겨우 살아남지 않았다. 그때도 '쇄신하겠다', '간담회하겠다'처럼 이번에 냈던 입장문과 비슷한 말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1년 내내 바뀐 게 없다는 점이 굉장히 화가 난다. 똑같은 일이 더 악화돼서 반복되고 있는 게 제일 화나는 부분"이라며 구단이 지난 시즌 강등 플레이오프까지 가고도 바뀐 게 없다고 지적했다.
짧은 인연을 맺었던 김병수 감독에게도 인사를 전했다. 포스트잇에 무언가 적고 있던 방 씨는 "(김병수 감독이) 어수선하고 힘든 시기에 와주셨다. 팬들이 올 1년간 화가 정말 많이 나 있었다. 그런데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선수들뿐만 아니라 팬들에게도 해준 것 같아서 감사했다. 그런 마음을 적었다"라고 설명했다.
끝으로 방 씨는 염기훈 감독대행을 향해 "팬들이 절대 욕하지 못할 레전드를 감독대행으로 앉힌다는 것 자체가 선수에 대한 책임도, 팀 운영에 대한 책임도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꼴찌하면서 은퇴시키는 것도 가슴 아픈 일인데 감독을 하면서 은퇴한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싶다"라며 "은퇴식을 성대하게 해주고 싶어서 기다리는 있는 팬들도 많다. 아직은 부르기도 어색하지만, 어떻게 해도 감독님 잘못은 없다. 부담을 안 가질 수는 없겠으나 너무 스트레스받지 않길 바란다"라고 진심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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