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슬럼프’ 박형식-박신혜 “너보다 더 큰 이유는 없어!” [김재동의 나무와 숲]
OSEN 김재동 기자
발행 2024.02.25 12: 08

[OSEN=김재동 객원기자] 의사노릇하면서 스타처럼 살 수 있는 인생이 몇이나 될까? JTBC 토일드라마 ‘닥터슬럼프’의 성형외과 의사 여정우(박형식 분)는 그런 인생을 살았다.
‘해외 의료봉사 다큐멘터리’에 우연히 출연한 것이 계기가 됐다. 실력 있고 잘 생겼고 긍정의 에너지 빵빵한 모습이 화면에 실렸을 때 세상은 열광했다.
좋은 머리+잘난 외모+바른 인성은 만화가 좋아하는 주인공 클리셰다. 여정우의 인생은 한 마디로 승승장구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 그 여정에 마침표를 찍었고 여정우의 인생은 박살났다.

안면윤곽술을 받던 마카오 카지노 상속녀의 테이블데스. 그제서야 알았다. 세상의 환호 속엔 그 못지 않은 시기와 질투가 숨어있음을. 스타 의사의 의료사고. 대중은 스타의 성공뿐 아니라 몰락에도 열광했다. 그제서야 알았다. 살아가면서 세상을 배신할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걸. 웬만하면 세상이 먼저 배신하기 십상이니까.
업무상 과실치사의 형사소송에 이어진 100억대 손해배상소송도 아찔했다. 집 팔고 차 팔고 병원 팔고도 착실히 몇 십억대 빚을 유지한 부채부자가 되어 흘러흘러 찾아든 어느 옥탑방서 그녀를 만났다. 남하늘(박신혜 분).
바닥에서만큼은 결코 만나고 싶지 않았던 콕 집어 단 한 명. 전국 1등 자리를 다투던 학창시절의 라이벌이자 대인배 여정우를 찌질하게 만들어 자괴감을 강요하던 그녀. 그토록 수많은 성취를 이루도록은 코빼기도 안뵈다가 아무 것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려서야 나타나다니. 옛말 그른 것 없다. 원수는 외나무 다리서 만나는 게 정석이다.
‘하~ 인생!’ 우울증 진단을 받고도 버텨 보려 했다. 하지만 이놈의 교수 갑질은 끝간 데가 없다. 보란 듯이 뻥 차주고 사표를 던졌다. 곧바로 깨달았다. 통쾌함은 찰나고 인생은 실전이란 걸.
자발적 백수의 삶은 전혀 달콤하지 않았다. 남하늘은 살면서 놀아본 적이 없다. 살면서 허투루 시간을 보내본 적도 없다. 생활이 공부고 특기도 공부고 취미도 공부였을 뿐. 어디로든 갈 수 있지만 가고 싶은 곳도 가야 할 곳도 없다.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할 일도 없다. 하릴없이 바람이나 쐬자 올라온 옥상서 놈을 만났다. 여정우 니가 왜?
세상이 온통 떠드니 눈 감고 귀 막지 않은 이상에야 여정우 처지를 모를 수는 없다. 다만 남하늘로선 제 발등의 불이 급해 안쓰러울 틈도 고소할 겨를도 없었을 뿐. 근데 여기 있다고? 우리 집 옥탑 방에?
이 고약한 만남은 다행히 한 쪽 문을 닫아버린 인생이 열어 준 다른 문이 되었다. 인생의 바닥을 사는 것이 나 하나만은 아니라는 사실은 위안이 됐고 각자의 주제에 서로를 연민할 수 있다는 사실은 나아갈 동력이 됐다. 빈정대고 약올리고 때로는 부둥켜 안은 채 눈물을 쏟는 하나하나가 서로의 생채기를 핥아주는 치유행위로 기능하면서 연정으로 발전했고 여정우와 남하늘은 다시 인생에 뛰어들 용기를 얻었다.
여정우는 재판에서 승소했다. 마카오 카지노 상속녀의 죽음은 상속싸움에 따른 음모로 밝혀졌고 여정우는 빈대영(윤박 분)의 스카우트에 응해 다시 메스를 잡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남하늘의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자신의 뒤통수를 친 선배 민경민으로 인해 다시는 누군가를 믿지 말자 다짐했던 남하늘은 여정우가 못견디게 좋았지만 불안과 두려움을 떨칠 수 없었다. 여정우가 언젠가 다시 자신의 고통이 될까봐 저어되고 그런 불안정한 자신이 여정우와 행복할 수 있을까 싶은 회의가 들었다. 그리고 함께 힘들어지는 연애는 접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고 여정우에게 이별을 고한다.
이 두 사람의 관계 회복을 위해 마련된 장치가 바로 여정우의 외상후스트레스장애다. 다시 메스를 잡은 여정우는 수술에 실패한다. 환자를 잃었던 당시의 충격으로 인한 피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하늘은 이홍란(공성하 분)으로부터 여정우의 상태를 전해 듣는다. 다시 제 위치로 돌아갔지만 여정우에겐 여전히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각성을 하게 된다.
심기일전해 다시 수술방에 들어선 여정우. 지끈거리는 골머리에 인상을 쓰며 묻는다. “마취과 원장님, 인덕션때 별 일 없었죠?” “네 괜찮았습니다. 혈압, 맥박 다 정상이구요.”란 대꾸가 돌아온다. 근데 이 목소리? 돌아보는 여정우 눈에 마스크를 쓰고 있는 남하늘의 또렷한 눈동자가 들어온다. 그리고 응원을 담은 남하늘의 목소리. “선생님 시작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살면서 이유가 충분할 때는 별로 없다. 더러는 한번 그냥 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예고편에서 여정우는 말한다. “내가 트라우마를 극복하는데 이유 같은 게 필요하다면 너보다 더 큰 이유는 없어!” 서로가 서로에게 이유가 될 수 있다면 그린라이트는 켜졌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사랑을 할 때 중요한 건 결말 따위가 아니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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