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여왕’ 김수현-김지원, 위악 떨 시간조차 아깝네! [김재동의 나무와 숲]
OSEN 김재동 기자
발행 2024.03.31 10: 46

[OSEN=김재동 객원기자] “수작 부리지 마. 가증스러워. 내가 어디가 고장 나서 다 잊어버린다 해도 니가 나한테 어떻게 했는 지는 절대 안잊어버려. 넌 내가 인생에서 가장 막막할 때 내 손을 놨어. 그래서 넌 나한테 용서받을 시간이 없을 거야. 니가 나한테 어떻게 해도 난 너 끝까지 미워만 하다가 죽어버릴 거거든.”
tvN 토·일 드라마 ‘눈물의 여왕’의 홍해인(김지원 분)이 백현우(김수현 분)에게 퍼부은 독설은 터무니없는 위악이었다.
먼저 홍해인은 백현우가 수작 부리지 않는, 아니 수작 부릴 수 없는 인간임을 잘 안다. 독일서 귀국하자마자 감사팀을 동원해 탈탈 털어봤지만 10원 한 장의 오차도 없었음만 밝혀졌다.

낯선 여자의 흔적이라도 찾아보려다 발견한 상호명 물랑루즈는 술집이 아닌 꽃집이었고, 그 곳에서 지출한 30만원은 직원 애경사에 홍해인 이름으로 발송된 화환값이었다. 몇 백만 원 단위의 간헐적 지출 역시 부조금으로 쓰였다.
사실 현우가 수작을 부리려면 독일서 부렸어야 했다. 이혼 합의서에 대해 “아니라고 말해! 모르는 거라고 해!” 강요했을 때 백현우는 변명을 했어야 했다. “지금은 왜 거짓말 못하니?” 물었을 때 백현우의 답은 엉뚱했다. “내가 오다 봤는데 우리 자물쇠 아직 있다”였다. 이런 남자가 뭔 수작.
그리고 해인도 보았었다. 할 말 있다며 방을 찾은 현우 손에 들려 있던 종이 한 장을. 그리고 “나 죽는데. 석 달 정도 남았데.”란 자신의 한 발 앞선 고백이 현우의 말문을 막았음을 이해했다. 그러니 이혼합의서 역시 수작일 수 없었다.
홍해인은 또 백현우가 가증스러울 수 없는 인간임도 잘 안다. 백현우는 옥상정원에 영숙이란 이름의 너구리가 산다는 홍해인의 거짓말을 4년째 믿고 있는 바보다. 지금도 간간이 옥상정원서 ‘영숙이’를 찾고 있다는 목격담이 들리니 빼도박도 못할 바보 맞다. 그리고 본시 가증스럽다는 말은 바보에게 어울릴 수 없는 수사다.
“절대 안잊어버려” 장담했던 그 말도 드라마 러닝타임 15분 후에 까맣게 잊고 만다. “끝까지 미워만하다 죽어버리겠다”는 다짐도 같은 시간 경과 후 “사랑해!”로 바뀐다.
다시 말해 인생 가장 막막한 순간 손을 놓아버린 백현우의 행태는 해인 표현 ‘절대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아니라 해인 속내 ‘가장 잊고 싶은’ 사건인 것이고 ‘미워만하다 죽겠다’는 다짐은 ‘끝까지 사랑하다 죽고 싶다’는 갈망의 다른 표현에 다름 아니다.
사실 위악을 먼저 떤 것은 백현우다.
이혼 합의서에 넋이 나간 해인이 슬리퍼 차림으로 호텔을 나섰을 때 뒤쫓아온 현우가 그녀를 발견한 곳은 도로 한 복판. 자칫 이방의 트럭에 치일뻔한 순간이었다. 가까스로 구해낸 해인은 텅 빈 눈으로 말했다. “백현우, 다음에 또 이런 일 생기면, 나 살리지 마!”
주치의는 조언했다. 환자가 삶의 의지를 놓지 않게 도우라고. 무의식중에라도 살고 싶은 사람은 도로에 뛰어드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고. 불치병 환자들은 그 병 때문만큼이나 많은 수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고. 그러니 희망이 됐든 욕망이 됐든 사랑이 됐든 심지어 증오가 됐든 무언가 붙잡을 것을 만들어주 라고.
백현우가 찾은 방법은 자신에 대한 증오였다. “그럼 아무 것도 안할거야? 소송 안하고 그냥 이혼해주면 나는 고맙고. 안그래도 같이 살기 힘들었는데. 알잖아 니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오죽하면 그랬겠니? 가만 있으면 재벌집 사위소리 들으면서 계속 살 수 있는데 왜 도망갈려고 했을까? 진짜 너랑 사는 게 치 떨리게 싫었으니까. 당신 석 달 뒤에 죽는댔을 때 솔직히 아, 난 살았구나 했어. 딱 석 달만 더 견디면 깔끔하게 헤어지는 거잖아. 근데 들켜버렸네? 그런데 네가 아무 것도 안하고 다 포기하고 그냥 이혼해준다고 하면 솔직히 난 고맙지.”
현우의 작전은 먹혀들어갔다. 해인이 어금니를 사려물었다. “너 진짜 어떡할려고 그러냐? 나를 이렇게까지 화나게 해서 감당이 되겠어?” 이후 해인은 아침부터 죽 대신 고기를 씹으며 전의를 불살랐다.
하지만 그도 잠시 어느 밤 현우의 퇴근길. 와이퍼 부산한 차창 너머로 익숙한 우산이 보인다. 길가에 쪼그려 앉아 현우의 동네 길고양이 친구 애옹이에게 밥을 주고 있는 해인이었다.
“해인아, 추운데 왜 이러고 있어? 차는? 오 기사님은?”현우가 물었을 때 홍해인은 “그러게, 나 여기 어떻게 왔지? 요즘 자주 이러네. 안 그래도 시간 없는데 자꾸 중간중간 시간이 날아가 버려”라며 애교스럽게 답한 후 “근데 당신 나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라 웃으며 물어올 때 현우는 무언가 잘못됐음을 알았다. 기억퇴행. 해인은 독일로 가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려놓고 있었다.
두 달도 채 남지 않았다. 게다가 중간중간 해인의 시간은 날아가 버린다. 해인에게 백현우는 세상에 남겨 두고 떠나기 가장 아까운 존재다. 슬픈데 고맙고 아프면서 안심되는 유일한 존재. 그런 현우를 증오하고 그런 현우를 대상으로 전의를 불사르는 데 쓸 시간이 없다. 사랑만 하기에도 일분 일초가 아깝다. 해인의 무의식은 현우를 원없이 사랑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사실 데면데면한 시절에도 해인에게 현우가 소중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현우가 건네준 우산을 3년 넘게 간직하고 있다. 현우의 동네친구 애옹이가 비를 맞고 있으면 가던 길 멈추고 우산을 씌워주기도 했다. 물론 말본새 고약하게 투덜거리긴 했지만. 하나밖에 없는 동생 수철(곽동연 분)이 매형에게 까불면 현우 눈 밖에서 반드시 해인의 응징이 뒤따랐다.
현우가 왜 그렇게 위악을 떨었는 지 해인으로선 이유를 알 수 없다. 하지만 해인의 무의식이 내린 결론은 어찌 됐든 현우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인 모양이다. 하다못해 증오일뿐 해인이 붙잡을 것이 사랑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우정에도 사랑에도 한계는 있다. 하지만 경계, 경계를 넘어서면서 그 한계는 얼마든지 키울 수 있다. 이미 현우에게 해인은 치떨리는 마눌님에서 안쓰럽고 귀한 해인이가 되어있고 까칠녀 홍해인의 입에서는 마침내 “사랑해!”란 단어가 튀어나왔다. 다만 안타까운건 해인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남은 시간동안 둘의 사랑이 얼마나 커질 지도 기대된다.
P.S. 작가와 연출의 능란함이 돋보인다. 현우가 위악을 떨 때 해인의 얼굴이 멀어지는 카메라워크도 인상적이었고 심각과 경박의 순간들을 적재적소에 배치, 시청자를 쥐락펴락하는 솜씨가 드라마를 매력적으로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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