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재동 객원기자] 그러니 사건은 무면허 운전, 중앙선 침범 정도로 마무리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사람이 죽을 이유도,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10년 세월을 파탄된 채 살 필요도 없었다.
ENA 월화드라마 ‘크래시’는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망가진 여러 인생들을 현실감 있게 조명하는데 성공했다.
드라마를 관통한 메인 사건의 개요는 간단하다. 객기 넘친 고등학생 표정욱(강기둥 분), 양재영(허지원 분), 한경수(한상조 분)가 표정욱 아버지 표명학(허정도 분)의 차를 몰래 끌고 밤거리를 질주한다. 셀카를 찍느라 한 눈 판 표정욱이 중앙선을 침범한다.
이때 마주 오던 차연호(이민기 분)의 차가 표정욱의 차를 피하다 건널목을 건너던 신혼부부 이현수(고은민 분) 김민성(김대호 분)을 충격하고 길 가에 서있던 중장비에 충돌한다.
이때만 해도 부상자는 있었지만 사망자는 없는 상황이었다. 차연호도 전방주시 태만으로 인한 과실치상 정도의 책임만 감당하면 됐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현장을 수습할 인원은 뭘 모르는 미성년자 3명뿐이었다. 그들의 리더 표정욱은 살려달라는 이현수가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는 이유만으로 살해를 결심하고 양재영, 한경수가 말릴 틈도 없이 전진, 후진으로 역과해 이현수와 뱃속의 아이를 살해한다.
어리석은 판단이 아닐 수 없다. 정작 이현수를 충격한 것은 차연호다. 서둘러 구호조치를 취했으면 비록 무면허 운전은 했지만 교통사고 희생자를 살린 의인이 될 수도 있었다. 설익은 지식, 왜곡된 가치관이 표정욱을 살인자로 만든 셈이다.
이 당시 표정욱의 상황인지는 아버지 표명학과의 통화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저 아버지 차 끌고 나왔는데 사람을 쳤어요.” 말은 맞다. 역과한 후에 건 전화였으니. 하지만 쓰러진 사람들은 자기 차량이 아닌 차연호 차량에 치인 사람들이다. 뺑소니를 칠 작정으로 그냥 갔다 해도 치상에 대한 책임은 차연호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니 굳이 현장을 확인하고 살인멸구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던 셈이다.
술자리서 아들의 전화를 받은 표명학도 상황파악 못하기는 매일반이다. 다짜고짜 강요한다. “너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들어. 지금부터 너네는 그냥 목격자야. 지나가다 우연히 본 거지. 호기심에 집에 있는 차 끌고 나왔다가 사고현장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신고를 했다고. 그것 말곤 일체 딴 소리 하지 마!”
드라마의 디테일이 아쉬운 부분이다. 드라마 속 표정욱은 표명학에게 다른 차가 자신의 차를 피하려다 사람을 쳤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물론 표정욱으로선 그 경황없는 와중에 자신이 친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 그런 착각 속에 평생 피해자의 부상 후유증 뒷바라지 하느니 죽이는 게 차라리 낫다는 풍문을 떠올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표명학은?
명색이 경찰서장이다. 아들이 사람을 쳤다면 당연히 차에 충격흔이 남아 있을 것이고 그럴 경우 단순히 목격자 행세를 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님을 알만한 위치다. 그런데 목격자로 신고를 하라고 한다.
만약 그냥 표정욱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는데 드라마가 생략했다고 가정하면 명백한 가해차량이 있으니 조용히 현장을 벗어나라고 조언해야 그럴 듯 하다. 피해자 목숨이 걱정됐으면 어디 공중전화쯤에서 119나 112 신고를 하라는 정도도 가능했을 것이다.
결국 술에 취해 판단력을 상실했거나 어떤 상황이든 왜곡할 자신이 있어서라고 이해하는 수밖에 없다. ‘원래라면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 그게 권력’이란 가치관의 소유자라면 그렇게 쓸 데 없이 자신만만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니 법정서 “저 그때 미성년자였거든요. 애가 뭘 알겠어요.”라는 표정욱의 말은 설득력 있다. “아버지 아녔으면 저 여기까지 안왔어요!”란 주장도 납득이 간다. “아버지가 어려서부터 그러셨죠? 정욱아, 너 갖고 싶은 것 있으면 수단과 방법 가리지 말고 얻으라고. 나 딴 건 모르는데 그건 확실하게 배웠거든요.”란 표정욱의 대사는 이들 부자의 왜곡된 가치관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들 부자는 혹시 그어질 지 모르는 제 인생의 빨간 줄이 두려워 남의 인생쯤은 몇이 됐건 망가뜨릴 수 있다는 가치관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사람이 왜 개차반이 되느냐는 건 중요하지 않다. 개차반 인성 자체가 원인이니까.
표명욱-표정욱 생물학적 부자지간의 인성적 화학작용은 법정에서 비등한다. 아버지는 아들을 팔고 아들은 아버지를 까발린다. 급기야 퇴정하는 표정욱 입에선 “그 인간 사람도 아녜요. 그 인간이 내 인생 망쳤어요!”란 단말마가 튀어나온다.
누구도 잡아먹히지 않고 팽팽하게 맞선 허정도와 강기둥의 악역 연기가 호미로 막을 일 가래로도 못 막고 만 어리석은 막장 부자의 현실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이들의 대척점에 차연호가 서있다. “가해자가 반성하지 않는 처벌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피해자가 동의하지 않는 처벌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거냐고?”묻는 김성민을 향해 말한다. “그 누구도 사람 목숨을 함부로 거둘 수는 없습니다.”
그런 차연호는 지난 10년 수 백, 수천 번 그날 일을 복기했다고 고백한다. “조금만 늦게 나갔더라면, CD를 떨어뜨리지 않았더라면, 핸들을 좀만 더 일찍 꺾었더라면.. 근데 결론은 항상 같았습니다. 아무리 후회해도 되돌릴 수 없다는 거. 하지만 잘못된 걸 바로잡는 건 얼마든지 가능해요...너무 늦었지만 두 분께 이 말은 꼭 하고 싶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는 악인일 지라도 인명을 중시하고, 사필귀정의 사회적 정의를 믿으며, 제 탓을 정면으로 응시한 채, 끊임없이 반성하는 캐릭터다. 사적 복수의 통쾌함을 배제한 인물이다. 그러다 보니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답답하고 매력 없다.
‘내 탓이오’에 매몰돼 표정 잃고, 우스개 못하고, 사회성 제로인 캐릭터가 흥행드라마의 주인공으로 12회를 끌어간 것은 전적으로 배우 이민기의 힘이다. 이민기는 성장형 캐릭터 차연호를 튀지 않는 절제력으로 뚝심 있게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그 슴슴한 주인공에게 웃음과 액션과 엉뚱함이란 MSG를 조화롭게 뿌려준 민소희(곽선영 분), 정채만(허성태 분), 우동기(이호철 분), 어현경(문희 분) 등 TCI 멤버들의 열연도 드라마 성공의 일등공신임은 부정할 수 없다.
드라마는 어느 순간 ‘시즌1’을 표방했다. 드라마 종반으로 갈수록 시나브로 이태주(오의식 분)의 비중을 키워나가는 것을 보면 시즌 2가 만들어질 경우 시즌1의 대표 악역 표명학 자리엔 이태주가 들어설 모양이다.
이들뿐만 아니라 속물 푼수 구경모(백현진 분) 서장과 쿵짝 맞추는 딸랑이 고재덕(김광식 분) 과장도 계속해 보고 싶은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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