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형 영화제작사들의 소위 '창고 대방출' 시즌이 끝나가고 있다. 그러나 이를 새롭게 채울 신작 소식들은 좀처럼 전처럼 자주 들려오지 않는 상황. 이렇게 한국 영화의 전성기가 저물어가는 걸까.
'탈주',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 '하이재킹', '핸섬가이즈' 등 최근 극장가가 모처럼 한국 영화로 가득 차고 있다. 앞서 '범죄도시4'의 개봉을 피했던 작품들이 여름 극장가를 노리고 앞다퉈 개봉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파일럿', '리볼버' 등도 개봉을 앞두고 있으며 '행복의 나라', '베테랑2'와 같은 기대작들도 하반기 개봉이 점쳐지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한국 영화 홍수가 언제까지 이어질 지는 미지수다. 당장 예정된 신작들의 수가 예년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 제작 편수 급감은 일찌감치 예견돼 왔으나 당장 내년 개봉 라인업을 점쳐야 하는 하반기에 접어들자 그 위기감이 조금 더 피부로 와닿는 실정이다. 당장 국내 영화 배급사 1티어로 꼽혀왔던 CJ ENM의 경우 '악마가 이사왔다' 이후 영화 신작 소식이 없고 오히려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내가 죽기 일주일 전'을 선보일 전망이다.
그렇다고 OTT 시리즈로 불리는 드라마 시장이 호황이냐 하면 그 것도 아니다. 지난 몇 해 간 넷플릭스에서 시작된 제작비 인상 특수 속에 영화 뿐만 아니라 다수의 드라마 시리즈 등이 폭발적인 제작비 인상을 누려왔다. 역으로 제작비 인플레이션을 감당할 수 있는 플랫폼이 넷플릭스와 같은 글로벌 OTT 사업자들만 남게되자 이를 버틸 수 없게 된 작품들이 창고에 쌓여갔다. TV 방송사업자들이 편성을 줄이고 극장가 불황이 장기화되자 OTT 편성에 의존하는 수많은 제작 작품들이 간택을 기다리는 처지가 된 것이다.
이처럼 영화와 드라마 등 대중 영상 예술이 존속 가능성을 위협받고 있는 시대 또 다른 대중문화 산업과 예술은 어느 때보다 성행하고 있다. 바로 야구와 전시다. 지난 3일 한국야구위원회(KBO)는 "2일까지 열린 2024시즌 408경기에서 총 592만9천395명이 입장했다"며 "남은 10경기에서 7만605명의 관중을 모으면 역대 처음으로 전반기 관중 600만명을 기록한다"라고 발표했다. 이 추세라면 올해 한국 프로야구 시즌 관중 수가 '천만 관중'을 기록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전시 관람객도 압도적 증가 추세다. 지난 4월 7일 영국 미술 매체 아트 뉴스페이퍼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한국 국립중앙박물관 관람객은 지난해 최초로 400만 명을 돌파하고 418만 285명으로 증가했다. 1945년 개관 이래 최다 수치로 불과 전년도의 341만 1381명보다 22.5%나 증가했다.
더욱이 이는 한구구 만의 추세가 아니다. 지난해 11월 출간된 패트릭 브링리의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에 따르면 미국을 대표하는 박물관 중 하나인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우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매년 거의 700만 명에 육박하는 관람객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뉴욕의 야구팀 양키스나 메츠는 물론 미식축구팀 자이언츠와 제츠, 농구팀 닉스와 브루클린 네츠의 관중을 합친 수보다 많은 수치다.
흔히 현재 트렌드에서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가 '도파민'으로 대표되는 상황. 전시장의 자극과 미디어를 통한 영화의 자극 중 어느 쪽이 도파민 분출에 효과적이냐를 따진다면 단연코 후자이다. 물론 현재 대중이 가장 큰 도파민을 느끼는 SNS 플랫폼이 아닌 대중문화 산업 안에서 한정된 것이긴 하다. 그러나 문화 콘텐츠 안에서 비교적 정적인 전시의 활황과 동적인 영화의 하향세를 비교한다면 더 이상 대중의 문화 소비 경향이 '자극'에 최우선을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대중문화산업의 주된 타깃 층인 현재 2049 세대는 단군 이래 어느 시대의 동년배보다 문화산업에 '대가'를 지불하는 인식이 확고한 편이다. 과거 어느 때보다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고, 참여하는 구성원들의 권리를 존중하는 문화도 자리를 잡았다. 분야 별로 '월 구독' 서비스가 보편적으로 확산되며 콘텐츠를 이용하기 위해 일정 수준 이상의 소비를 하는 것이 당연시 되고 있다.
그로 인해 현재 대중의 최소한의 문화생활 비용도 높아지고 있는 추세다. 경기 불황의 시기 이는 비용의 효율을 따지는 가성비로 직결된다. 우스갯소리로 전 국민 구독료 5만원 10만원이 성큼 다가오는 가운데 가성비보다는 비용에 대한 심리적 만족도를 따지는 '가심비'가 대두되고 있다.
영화에 한해서도 마찬가지다. 흔히 월 구독료 2만 2천원 대인 OTT와 비교해 2시간 남짓한 영화 한 편의 티켓값 1만 5천원이 영화관 진입의 가장 큰 장벽인 것처럼 평가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당장 지난해 4분기 '서울의 봄'과 '파묘'에 이어 올해 상반기 '범죄도시4'까지 천만영화가 연이어 3편이나 등장했다. 각 작품의 흥행 요소에 상영관 독과점을 비롯한 환경적 요소들은 따져봐야 하겠으나, 이를 차치하고라도 관객이 극장으로 향하는 이유에 티켓값이 전부는 아니었던 셈이다. 어떤 식으로든 '봐야 할 이유'가 충분한 작품들만이 '천만 관객'의 선택을 받을 수 있었다.
애니메이션 영화 '인사이드 아웃2'가 계속해서 국내 박스오피스 1위를 쥐락펴락하는 가운데 이와 경쟁하는 한국 영화들은 얼마나 관객들에게 그 이유를 선사해주고 있을까. 동시에 기대감을 충족시키는 작품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최근 이성민, 이희준의 코믹 연기와 기발한 소재로 호평받은 '핸섬가이즈'가 박스오피스 1위 없이도 손익분기점을 돌파했다. 배우 손석구가 제작에 도전한 영화 '밤낚시'는 단돈 1천원의 관람료에 12분 남짓한 상영시간이라는 '스낵무비'를 표방하는 장르 영화로 이례적으로 개봉해 5주차까지 연장 상영을 이어갔다. 모두 실관람객들의 후기로 호평이 자자했던 작품들이다. 결국 도파민에 절여진 관객들이 쉽기만 한 작품을 찾는 게 아니다. 전에 없던 도전을 얼마나 성실한 고민으로 세련되게 풀어냈는지가 수준 높아진 관객들이 귀신 같이 파악하고 골라보는 실정인 것이다.
활황 속에도 전시 업계는 계속해서 몸집을 키울 전망이다. 올해 상반기를 끝으로 여의도 63빌딩에서 아쿠아리움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프랑스 대표 미술관 퐁피두센터 서울 분점이 들어설 인테리어 공사가 진행 중이라고. 더현대를 중심으로 젊은 세대 유동인구가 어느 곳보다 왕성한 여의도 한복판, 서울을 상징하는 건물 중 하나인 63빌딩의 구성 변화는 많은 시사점을 남긴다. 저출산 시대 어린이 관람객 감소도 한 몫 했겠으나 더욱 주목할 부분은 아쿠아리움이라는 공간 자체에 대한 인식의 변화다. 동물원이나 수족관 자체에 대해 어린이 관람객들을 위한 교육 및 추억의 공간이 아닌 동물 학대의 공간이라는 인식을 지울 수 없는 시대. 일말의 불쾌감은 대중의 발길을 끊게 만든 것을 과감하게 반영해 방향을 튼 결과로 풀이된다.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산업 영화, 드라마 나아가 콘텐츠 산업 자체의 명암이 여기에 달렸다. 체험이 됐든 감상이 됐든 SNS를 통한 과시의 현장이 됐든 티켓값을 지불할 이들에게 일말의 불쾌감도 있어선 안된다. 이제는 차원이 다른 수준 높은 고양감 만이 '가심비'를 따지는 대중의 만족도를 채워줄 수 있다. 혹은 목적 의식이 분명하게 직관적으로 대중을 이해시키거나 설득하는 데 성공하거나. 어느 쪽으로든 뚜렷한 결과물만이 대중을 붙잡을 수 있다. 그 만한 고민을 누구보다 대중 친화적이어야 할 국내 영화, 드라마 시리즈 업계는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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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각 영화 포스터, 넷플릭스 제공, OSEN 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