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FA가 ‘클린 시트 대명사’ 실턴과 바르테즈를 새삼 조명한 까닭은?[최규섭의 청축탁축(清蹴濁蹴)]
OSEN 우충원 기자
발행 2024.08.19 08: 55

피터 실턴(74·잉글랜드)과 파비앵 바르테즈(53)는 일세를 풍미했던 빼어난 수문장들이다. 실턴은 20세기 마지막에 한 점을 찍었고, 바르테즈는 21세기를 열었다. 당연히, 세계 축구 으뜸 무대인 FIFA[국제축구연맹] 월드컵을 수놓았다. 팬들의 가슴속에 좀처럼 지워지지 않을 화려한 발자취를 아로새겼다.
변하지 않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이제 두 영웅에 대한 각인도 시나브로 퇴색해 간다.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데 ‘돌연’, FIFA가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두 수문장을 소환했다. 두 사람이 월드컵 무대에 고별을 고한 지도 벌써 많게는 34년, 적게는 18년이 흘러갔다.
FIFA는 최근 누리집을 통해 두 위대한 GK를 조명했다. 2026 북중미 FIFA 월드컵을 앞두고 기획한 연재물의 하나로, 두 걸출했던 GK의 눈부신 활약상을 그때로 되돌아가 더듬고 밝혔다.

[사진] ⓒGettyimages(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실턴과 바르테즈는 지난주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최다 무실점 경기 기록 보유자로, 이른바 ‘클린시트(Clean Sheet) 왕’으로 각광받았다. 잉글랜드와 프랑스 최후의 보루였던 실턴과 바르테즈는 나란히 10경기에서 단 한 골도 내주지 않았다. 1930년에 발원한 월드컵 94년 역사에서, 두 사람만이 기록한 두 자릿수 클린 시트다. ‘철벽 수문장’으로, 당당히 FIFA 월드컵 기록사의 한쪽을 장식했음은 물론이다.
각각 세 차례 무대에서 두 자릿수 무실점 경기 기록하며 월드컵 최다 클린 시트 기록 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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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에서, 실턴과 바르테즈의 활동 시기는 조금도 겹치지 않는다. 기록을 세우는 데 똑같이 세 번의 월드컵 마당이 필요했던 점에 비춰 볼 때 교묘하다는 느낌마저 자아낸다. 활동 무대가 달랐기 때문에, ‘저마다 눈부신 몸놀림으로 두 자릿수 클린 시트 기록을 세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실턴은 1982 스페인 대회 때 첫걸음을 내디뎠고 1986 멕시코 대회를 거쳐 1990 이탈리아 대회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바르테즈는 자국에서 열린 1998 대회 때 첫 장을 열었고 2002 한국-일본 대회를 거쳐 2006 독일 대회 때 마지막을 장식했다(표 참조).
기록 수립 과정에서 두 GK의 나이를 비교하면, 실턴이 보다 ‘노익장’의 열정을 내뿜었다. 1949년 9월 18일생인 실턴(32~40세)이 1971년 6월 28일생인 바르테즈(26~35세)에 비해 6년 정도 나이가 많은 시절에 기록을 쌓아 갔다.
실턴이 첫걸음을 내디딘 날은 32세 9개월을 막 넘긴 1982년 6월 20일이었다. 스페인 대회 1차 그룹 스테이지(4) 두 번째 판인 체코슬로바키아전(2-0 승리)이 대기록의 서장이었다. 마지막 발걸음은 40세 9개월 8일을 맞은 1990년 6월 26일에 찍었다. 이탈리아 대회 녹아웃 스테이지 첫판 벨기에전(연장 1-0 승리)에서 내디뎠다.
바르테즈는 27세 생일에 16일을 남겨 놓은 날인 1998년 6월 12일 첫발을 뗐다. 그룹 스테이지(C) 첫판 남아프리카공화국(3-0 승리)이 대기록의 서막이었다. 마지막 발걸음은 35세 생일을 갓 넘긴 2006년 7월 5일에 내디뎠다. 독일 대회 4강 포르투갈전(1-0 승리)이 화룡점정의 역사적 한판이었다.
대회별 무실점 경기 획득 과정을 보면, 실턴이 고르게 쌓아 간 반면, 바르테즈는 진폭이 컸다. 실턴은 4(1982 스페인)→ 3(1986 멕시코)→ 3(1990 이탈리아) 경기였다. 이에 비해 바르테즈는 5(1998 프랑스)→ 1(2002 한국-일본)→ 4(2006 독일) 경기였다.
[사진] ⓒGettyimages(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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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월드컵 마당인 스페인 대회에서, 실턴은 화려하게 등장했다. 그룹 스테이지 첫판 프랑스전(3-1 승리)에서 한 골(전반 24분 제라르 솔레르)을 내주며 예열을 마친 실턴은 2차 체코전과 3차 쿠웨이트전(1-0 승)에서 거푸 무실점 경기를 펼쳤다. 이어 2차 그룹 스테이지 독일전(0-0 무)과 스페인전(0-0 무)에서도 무실점 선방을 거듭했다.
그러나 문호를 넓혀 24개국이 출전해 처음 자웅을 겨룬 독특한 대회 방식에 발목을 잡혔다. 1~2차 그룹 스테이지를 거쳐 4강 녹아웃 스테이지로 펼쳐진 이 대회에서, 잉글랜드는 단 한 번도 지지 않았으나(3승 2무), 4강에 올라가지 못하는 비운을 맞닥뜨려야 했다. 실턴의 눈부신 활약상도 퇴색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실턴은 실의에 빠지지 않았다. 4년 뒤 멕시코 대회에서, 클린 시트를 7경기로 늘렸다. 그룹 스테이지(E) 2차 모로코전(0-0 무), 3차 폴란드전(3-0 승), 16강 파라과이전(3-0 승) 등 3경기 연속 클린 시트의 신들린 듯한 몸놀림을 뽐냈다.
그렇지만 이번엔 암초로 떠오른 ‘신의 손’에 좌초됐다. 8강 아르헨티나전(1-2 패)에서, 디에고 마라도나의 핸드볼 파울이 헤딩골로 인정받으면서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실턴은 오뚝이였다. 불혹(不惑: 40세), 우리 나이로 42세를 맞이해 치른 이탈리아 대회에서 그야말로 ‘백전노장’의 꺾이지 않는 투혼을 불살랐다. 그룹 스테이지(F) 2차 네덜란드전(0-0), 3차 이집트전(1-0), 16강 벨기에전(1-0 승)에서 3경기 연속 클린 시트를 기록했다.
홈그라운드에서 열린 프랑스 대회에서, 바르테즈는 펄펄 날았다. 단일 대회 최다 클린 시트 경기(5)라는 대기록을 세우며 고국에 월드컵 첫 우승의 감격을 안겼다. 그룹 스테이지(C) 첫판(남아프리카공화국 3-0 승)에 올린 기세를 2차 사우디 아라비아전(4-0승), 16강 파라과이전(1-0), 8강 이탈리아전(0-0 무·승부차기 4-3)을 거쳐 결승 브라질전(3-0 승)까지 그대로 이어 갔다.
한국-일본 대회는 바르테즈에게 ‘약속의 땅’이 아닌 ‘죽음의 무대’였다. 그럴 만했다. 디펜딩 챔피언이 그룹 스테이지 탈락(1무 2패)이라는 충격적 결과표를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고작 단 한 경기, 조별 라운드(A) 2차 우루과이(0-0 무)전 클린 시트로 스스로를 달래야 했다.
4년이 흐른 독일 대회에서, 바르테즈는 ‘사라진 존재’가 아니었음을 전 세계에 힘차게 알렸다. 그룹 스테이지(G) 1차 스위스전(0-0 무), 3차 토고전(2-0), 8강 브라질전(1-0 승), 4강 포르투갈전(1-0 승)에서 골문에 물샐틈없는 그물망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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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회에서, 바르테즈로선 한국이 야속할지도 모르겠다. 조별 라운드 두 번째 한국전(1-1 무)에서 후반 36분 박지성에게 동점골을 내줬기 때문이다. 이 실점이 없었더라면, 바르테즈는 월드컵 기록사 최다 클린 시트 부문에서 홀로 맨 윗자리에서 영광을 누릴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무실점 경기, 곧 클린 시트는 GK가 매 경기에 나설 때마다 마음을 다지며 노리는 과녁이다. 무실점 경기가 얼마나 대단한 수문장인지를 가늠하는 제1 척도로 곧잘 쓰임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세계 축구의 대향연인 월드컵에서 기록 보유자로 자리매김한다는 건 그래서 더욱 뜻깊다. 실턴과 바르테즈가 월드컵 무대를 가장 눈부시게 수놓은 빼어난 수문장으로 회자할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전 베스트 일레븐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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