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웅·나훈아, 다 비교 NO" 데뷔 60주년에도 영원한 '오빠, 남진' [인터뷰](종합) 
OSEN 연휘선 기자
발행 2024.08.29 18: 36

'트로트'는 원래 정통 가요가 아니고, 후배 나훈아와 임영웅과의 비교는 거부한다. 데뷔 60주년 여전히 소신을 굽히지 않는 영원한 '오빠', 가수 남진을 만나봤다.
남진은 29일 서울시 종로구 삼청동에 위치한 한 카페에서 국내 취재진을 만났다. 그는 이 자리에서 영화 '오빠, 남진'에 대해 이야기했다. 
1946년 전라남도 목포에서 태어난 남진은 1965년 데뷔 앨범 '서울 플레이보이'를 발표하며 가수로 데뷔했다. 올해로 가수 데뷔 60주년을 맞았다. 오는 9월 4일 개봉하는 '오빠, 남진'은 그런 남진이 대한민국 최초의 팬덤을 이끈 '원조 오빠'로서 데뷔 60주년을 기념하고 오직 팬들을 위해 헌정하는 영화다. 

"여자 기자들과 인터뷰는 처음이다"라고 운을 뗀 남진은 "내 시절에는 방송국에도 여자가 없었다. 부장 한 분 있었다. 살아있으면 80대일 거다. 세월이 지나서 이렇게 여기자들이 있는 자리에서 인터뷰해보긴 처음이라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처음으로 영화로 대중 앞에 서게 된 것에 대해 "사실 영화는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 제작자가 만든 거다. 1%도 생각해본 적 없다. 단, 하다 보니 나도 되돌아보게 되더라. 그 나이로 연예계에 드물게, 나처럼 활동한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다큐를 통해서 나도 나를 돌아볼 기회가 처음으로 생겼다. 나도 영화를 보면서 감동했다. 20년 전 내 모습을 영화로 수십년 만에 처음 봤다. 세월이 인생을 가르친다고, 60년 하고 보니 오늘의 긴 세월을 노래할 수 있는 것도 축복이구나 싶었다. 본인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많은 팬들이 있어서 사랑과 후원이 있어서 오늘도 하고 있다는 감사함을 새삼 느끼게 되는, 개인적인 의미가 있었다. 다큐멘터리 만의 의미가 아니더라"라고 털어놨다.
또한 영화를 본 소감에 대해 "웃음이 나더라. '내가 저 때 저렇게 생겼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싱싱했겠나. 과일로 말하면 풋사과다. 귀엽더라. 그 때 시절하고 지금은 전혀 다르죠잉. 전혀. 사람은 똑같아도. 그 때는 오로지 학창시절 음악을 좋아하고 가수 한번 해보겠다고 뛰어나온 거였다. 운이 좋아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가수가 되고 스타가 된 거다. 그걸 되돌아본 계기가 된 거다"라며 웃었다. 
실제 과거 '미남가수'로 유명했던 남진. 정작 그는 "인간 김남진은 잘 모르시고 가수로만 아실 거다. 그 때는 인물 좋은 분들이 없던 것 같다. 내 자신이 겸손한 게 아니라 잘생겼다는 생각을 한번도 해본 적 없다. 전라도 말로 '귄대가리 있게 생겼다'라고 생각했다. 친구도 다른 사람보다는 많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울리길 좋아했고. 정겨운 사람들을 좋아했다. 또 인간성 좋은 사람들을 좋아했다"라고 밝혔다. 
남진은 "사는 게 다 '인연'이다. 세상에 태어날 때 내가 나오고 싶어서 나오냐. 엄마, 아버지 인연으로 태어나지 않나. 그 인연으로 노래를 하게 됐다. 원래는 연극을 좋아해서 학교 다닐 때 연극부였다. 운동, 연극 두 가지를 했다. 그 것도 공부하기 싫어서 했다. 그런데 좋은 인연으로 우연히 어디 놀러가서 밴드 마스터를 만나서 술 한 잔 마시고 노래한 게 지금까지 이어졌다. 그러니까 '인연'을 실감한다. 제가 한양대 연극영화과에서 임현식, 남정임과 다 한 반이었다. 유명하진 않았다. 영화를 좋아해서 다니다가 우연히 놀러가서 노래를 한번 했다. 가요의 '가'도 몰랐다. 1950년대 후반에는 팝송이 많이 들어와 유행이었다. 그 때 팝송을 좋아했다. 레이 찰스, 냇 킹 콜, 엘비스 프레슬리 이런 노래만 좋아했다. 가요는 들어본 적도 없다. 그러다가 술 한 잔 처음 먹고 노래할 때 마스터가 목소리가 특이하니 전화번호 한번 달라고 한 게 여기까지 왔다"라며 호탕하게 말했다. 
운으로 가수가 된 그이지만 데뷔 60주년은 운을 실력으로 만들기 위한 세월이었다. 후배 가수 장윤정도 여전히 도전하는 남진에 대해 존경을 표한 바. 남진은 "이유가 있다. 내가 가진 것에 비해, 노력에 비해 행운 때문에 스타가 됐다. 가요를 모르고 가수가 된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다. 그 만큼 남보다 행운이 많은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1950년도, 1960년도에 부모 잘 만나서 수저 잘 물어서 고생도 안 해보지 않았겠나. 그 시절 신문사 회장, 국회의원 큰 아들로 태어났으니 세상을 잘 몰랐다. 그러고 스타가 되니 깊은 맛은 없을 거다. 애절함 없이 노래 감성을 따라한 것이다.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에 더 노력하고 더 파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거 모르고 지나왔다. 세월이 지나고 보니 감사함에 보담을 못하고 그냥 스타라는 분위기에 휩쓸려 지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문적으로 들어가면 피눈물나는 노력을 하는 사람이 나같은 사람한테는 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털어놨다.
이어 "신인 때 무명시절이 없이 고생도 안 했으니 내 자신도 놀랄 정도로 무언가 강한 압박감이 있었다. 유명해진 후에 나이 먹으면서 데뷔 때보다 열정을 많이 갖게 됐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루에 몇 시간씩 노래를 듣고 느낀다. 요즘 노래 못하는 사람이 어디있나. 집집마다 노래방 기계가 다 있지 않나. 우리 때는 녹음 시절이 명보극장 앞에 단 한 곳에 있었다. 그런 시대니까 열심히 해서 팬들에게, 또 내 자신에게 가수로서 진지함과 깊음을 느끼고 싶다. 예전 같으면 하라고 해도 안 한다. 세월이 가니 이런 것도 경험이고 주위 사람에게 참고가 된다면 좋겠더라. 지금은 무명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다. 60년 전에 히트한 노래들을 지금은 다시 불러보고 싶다. 인기 가수로 부른 노래가 아니라. 정말 가수로 불러보고 싶다. 예민한 사람은 요즘 내 도래 듣고 다 느끼더라. 그게 정상이다"라고 고백했다. 
그 계기는 무엇일까. 남진은 "세월이 지나니 되돌아보지 않겠나. 뭔가 아쉽고, 뭐가 다르고, 뭐가 잘못 됐나 돌아보게 되더라. 그러다 보니 음식으로 하면 '진가'라고 할까 그런 걸 느껴보고 싶더라. 노래들에 가사, 멜로디, 리듬이 있다. 이걸 다 정확하게 알고 싶더라. 그냥 인기곡으로 불렀지만 이제는 진짜 오래됐으니 진짜 팬들에게 진짜 맛을 불러보고 싶더라. 나뿐만 아니라 나 정도 되는 관록 있는 가수라면 다 가질 거다. 분명히, 말을 안 해서 그렇지"라고 강조했다. 
그만큼 우여곡절이 많았던 남진. 그는 "나같이 많은 놈도 없다. 전쟁 때 가서 2년, 만 24개월 있다 온 놈이 있나. 다낭 옆에 호이안에 해병대 청룡여단 본부가 있던 곳이다. 기분이 좀 이상하더라. 그냥 해변이다. 모래에 잔디만 있는데 좁아졌더라. 개발되고 달라진 것 같더라"라며 놀라워 했다.
이어 월남전 참전 당시에 대해 "해병대는 육군의 10분의 1도 안 된다. 월남에 육군 사단이 몇 사단이 있지만 우리는 여단 하나 밖에 없었다. 가고 싶어서 간 건 아니었다. 해병대에 입대는 자원 입대 했다. 그 때 마침 월남전이 있어서 가야될 입장이 있더라. 원해서 간 건 아니었다. 갈 수밖에 없는 여건이 있었다. 졸병이니까 명령을 안 따르면 안 됐다"라고 고백했다. 
또한 "원래는 1년 이상 못 있다. 군법에 사병은 해외 복무를 1년 이상 못하게 돼 있다. 그런데 여단장한테 사정을 해서 1년 더 있게 해달라고 했다. 그 때가 김신조 대문에 군 생활이 만 36개월로 연장될 때였다. 그래서 제대 며칠 남기고 한국 돌아왔다. 한국 가서 부대 안에서 빌빌거리며 있느니 전쟁터에 있다가 만기 채워 나오는 게 팬으로서 볼 때 멋지지 않겠나"라고 밝혔다.
그는 "이번에 55년 만에 호이안에 가면서 내가 왜 1년을 연장했는지 이해가 안 가더라. 23세 때였다. 남자 나이 23세면 아가씨 안 그리울 때냐. 그 때 1년은 짧은 세월이냐. 이건 분명히 뭔가가 뇌에 온 거다. 내가 한 게 아니다. 저는 지금 신앙인이다. 나라면 연장하지 않는다. 그 분이 온 거다. 그래서 더 신앙을 갖게 됐다. 오늘날 나를 있게 해준 것도 월남전이다. 그 때 다시 돌아간다 해도 똑같을 거다. 돌아와서 제 전성기가 된 거다"라고 말했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동방신기의 유노윤호가 극 중 자신을 연기한 일에 대해서도 "잘 봤다. 전라도 말을 잘 하더라"라고 웃으며 회상했다. 
금수저에서 '딴따라'로, 피습을 당한 뒤에도 가수 생활을 이어온 남진. 그는 "인생은 파도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나이도 먹고, 여자 팬들이 장가 가면 영원하지 않더라. 팬들도 떨어져 있고. 인기도 가져본 사람이 그 감상을 안다. 안 가져본 사람은 모른다. 가져본 사람은 쓸쓸하고 허전하고, 외롭고, 이런 허탈한 것을 있을 수록 느낀다. 그런 기분도 충분히 그 때 당시에 느꼈다. 인생이란 게 새롭게 시작하게 된다. 그 환경 속에 다시 출발하는 게 쉬운 건 아니더라. 거기에 또 도움이 필요했다"라고 말했다.
더불어 "4년이라는 공백이 있었는데 그 때 나의 공백을 채워준 게 '빈 잔'이라는 노래다. 가수니까 노래가 좋으면 다시 관심을 받게 된다. 사라진 가수가 수십명인데 나는 슬럼프가 왔다가 다시 활동할 때 그런 대곡을 만난 것도 행운이다. 제 히트곡 중에서 홍보 안 하고 히트한 건 '빈 잔' 하나다. 나하고 친했던 방송국 관계자들이 거의 다 없을 때였다. 실무진에 없었다. 아무래도 서먹했다. 시대도 바뀌었다. 가요계 종사자들도 바뀌더라. 나라도 바뀌고. 그런데 '빈 잔'이 나왔을 때 친한 사람이 있어야 조금 틀어주고 할 텐데 다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얘기하기도 쑥스럽다. 그래서 홍보도 안 해보고 10년이 지났다. 1981년에 녹음하고 나왔는데 1991년에 히트했다"라며 "방송에서 한 번도 안 부르고. 입에서 입으로 퍼졌다. 라디오나 TV는 방송 한번만 타면 수백만이 듣는데 '빈 잔'은 한 명씩 들으면서 히트 한 게 남다르다. 더 의미가 남다르다. 진짜 히트곡이다. 대개 발단이 PR을 하면서 그렇게 되는데 '빈 잔'은 TV에 딱 한 번 나갔다. 그런데 뭔가가 외부에서 압박이 있던 것 같다. 방송 출연도 못하고 외압이 있었다"라고 고백했다. 
그 외에 남진의 인생곡은 무엇일까. 남진은 "슬럼프가 있어서 속으로 '요시(그래, 두고보자)'라는 식의 마음이 생겼다. 3년 동안 독심을 먹고 만든  앨범이 있다. 녹음도 끝내고 판만 찍으면 된다. 그 때 마침 지방 공연이 있어서 보름 만에 올라온 적이 있다. 신사동에 사무실이 있었다. 그런데 지방을 다녀오니 한 분 있던 여직원이 작곡하는 분이 일주일 내내 있다가 안 오시니까 카세트 하나 두고 가셨다고 해서 한 번 틀어보라고 했다. 무심코 듣는데 가수니까 듣는 귀가 있지 않겠나. 멜로디가 이상했다. 딱 듣는데 전율이 왔다. 3년 동안 준비한 12곡이 내일 모레 나오는데 듣자마자 작곡가한테 전화를 했다. KBS 악단장이었던 송태오 씨한테 빨리 편곡하라고 해서 장충동에 나하고 맞는 유명한 녹음실이 한 달 치가 다 차있더라. 명단 중에 나랑 조금 친한 사람이 '신토불이' 부른 배일호였다. 한 곡만 하면 되니까, 만들어서 무조건 갔다. 배일호가 나를 보고 깜짝 놀랬다. '왠일이시냐'고 하더라. 말도 안 하고 갔다. 그렇게 끼워서 녹음하고 넣은 게 '둥지'"라고 밝혔다.
이어 "그 노래를 바로 넣어서 3년 동안 준비한 거 밑으로 깔고 '둥지'를 냈다. 이러니 운이 아니냐. 알아차린 나도 보통은 아니다. 그렇지만 고맙다. 내 노래는 다 송태오가 무명 연주자일 때 해줬다. 인연이 그래서 무서운 거다. 지금 들어도 '둥지' 같은 편곡은 하나도 없다. '둥지'는 트로트가 아니다. 그건 락앤롤이다.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곡이다. 락앤롤, 탱고, 맘보, 트로트 등을 모은 리듬 자체를 다 '트로트'라고 하는 거다. 트로트는 일본이 일제시대에 들여와서 한 말이다. 원래 우리 나라는 판소리였다. 목욕탕에서 부르던 게 판소리, 민요, 시조다. 우리 나라에 원래 트로트가 없었다. '트로트'는 프랑스 노래다. 우리 말로 트로트를 '뽕짝'이라고 했는데 그 리듬을 일본에서 자기들 말로 '엔카'라고 했다. 그게 트로트가 된 거다"라며 '미스트롯', '미스터트롯' 등의 흥행에 대해서도 그는 "심사위원 몇 번 나갔지만 속으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둥지'도 트로트가 아니다. 그건 락앤롤이다. '님과 함께'도 미국 노래 '고고'다. 리듬이 다르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후배 가수 나훈아와의 라이벌 구도에 대해서도 그는 "훈아 씨는 전형적인 트로트 가수"라고 웃으며 "나는 트로트 가수도 트로트다. '울려고 내가 왔나'가 내 첫 히트곡이다. 그 노래는 트로트다. 내가 좋아하던 노래는 다 망했다. 한번도 방송도 못 나왔다. 그걸 경험 삼아 다른 노래로 떠도 금지되더라. '연애 0번지'가 금지됐다. 지금이랑 다른 시대다. 지금은 방송에서 욕도 하는데 예전 같으면 바로 안기부 끌려가고 키스 씬도 못했다. 그런 시절이다. 지금 영화에서도 별 욕도 다하는데 너무 놀랍다. 내가 잘못 듣고 있나 싶더라. 왜냐하면 나는 그 때 사람이니까"라고 장황하게 설명하며 "우리 훈아 씨는 타고난 트로트 가수다. 아무나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정말 타고난 가수다. 연예계로 치면 라이벌 구도가 됐는데 그건 100% 미디어에서 만들어준 거다. 연예계 비즈니스도 돈을 벌어야 하니까, 그 때 당시에는 라이벌 시대를 만든 거다.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훈아 씨는 나이 차이도 많고 한참 후배다. 제가 그 친구 고등학생 때 봤다. 1968년 해병대 입대할 때 처음 봤다. 남산 야외 음악당에서, 내 친구 제자로 처음 봤다. 나중에 월남 다녀오니 많이 커졌더라. 라이벌로 만들어서 가요계 전성기를 만들 수 있게 됐다"라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그는 나훈아의 은퇴 선언에 대해서도 "마음이 늙으셨나 왜 했는지 모르겠더라. 이해가 안 간다. 노래가 안 되거나, 나이가 먹었다거나, 다쳤다거나, 입원했거나 입원해도 나으면 나오면 된다. 조용필 씨가 한살 더 위인데 여전하지 않나"라며 의아함을 표했다. 이어 "우리는 만들어진 라이벌이고 그냥 후배일 뿐이다. 나는 지나가는 누구랑도 마음만 맞으면 하루 종일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나훈아 씨는 개성이 강한 분"이라고 평했다.
남진은 "요즘 친구들 다 노래는 잘한다. 가까이 안 해보니까 성품은 모른다. 인간적인 것을 겪어보지 못하니까. 예전엔 공연을 가면 지금 공연장은 호텔 수준이다. 예전엔 공연장에 선풍기 한, 두개 있는 수준이다. 분장실도 하나라 다같이 한 공간에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분장실도 다 달라서 얼굴도 못 보더라. 그 때는 다 같은 곳에 있는데 선배 앞에 후배가 다리 꼬고 있겠나. 우리 때는 그랬다. 지금은 공연장에 가도 얼굴을 못 본다. 찾아와서 인사하면 모를까. 그렇다고 누구 오라고 하는 사람이 있나. 자기가 알아서 하는 거다. 요즘 후배들은 환경 자체가 우리 때와 다르다. 선배로서 아쉬운 것은 동료애다. 선후배 관계가 가까우면 좋지 않겠나. 다만 바람일 뿐이다. 좋고, 나쁘고는 아니다"라고 했다. 
한국 최초의 팬클럽을 창단한 가수 남진. 여전히 '오빠'라고 부르며 그를 추앙하는 팬들에 대해 남진은 "내 팬들이 10대 일 때 나를 봐서 지금 70대다. 10대 소녀가 70대가 됐다. 그 중에 어렸던 사람이 60대다. 그런 세월이 고맙다"라고 웃으며 "지금은 내 느낌은 팬이 아닌 친척, 가족 같은 느낌으로 본다. 왜냐하면 세월이 길었으니까. 무대에서 노래 해도 표정을 보면 안 다. 70대, 80대에도 표정은 예전으로 돌아가는 표정이 보이더라"라고 했다. 
공교롭게도 원조 오빠 남진의 '오빠, 남진'과 지금 대세 임영웅의 공연 실화 영화 '임영웅 아임 히어로 더 스타디움'이 비슷한 시기 상영되는 상황. 남진은 "인기만 있는 팬들의 공연이고 나는 60년이란 세월 속에 흑백시절부터 극장 냄새나는 화장실 옆에 분장실 있던 곳에서 살아온 나와 비교를 하는 게 맞나. 전혀 다르다. 힘들었던 시절 1960년부터 지금까지의 스토리가 있는 게 '오빠, 남진'이다. 모르겠다. 재미있겠지. '미스터트롯' 심사하면서 봤겠지만 자세히는 모른다. 이름 있으면 후배고 이름 없으면 후배 아니냐. 다 후배다. 인기는 대중이 평가하고 나는 인성만 본다. 인성이 틀리면 날고 기어도 여자고 남자고 안 된다"라며 웃었다. 
여전히 열정과 자신감 넘치는 남진이 생각하는 마지막 무대는 어떨까. 영화에서는 적어도 "오늘은 아니야"라며 웃은 남진. 그는 "아직은 생각해본 적 없다. 내일 관둘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자연에 의해 관두는 거지 내가 생각해본 적은 없다. 솔직히 마지막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다. 그래도 어느 정도 노래를 할 수 있을 때 마지막 무대가 됐으면 좋겠다. 노래를 어느 정도 멋있게, 정말 마음에, 가슴에 놓고 부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관두고 싶다. 생각을 얘기하는 거다. 노래를 '은퇴 공연'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노래가 안 되면 떠나야겠다고 생각한다. 노래가 되는 데 떠날 필요는 없다"라고 했다.
이어 "토니 베넷이라고 프랑크 시나트라 친구가 있다. 한국 나이로 97세까지 마지막을 부르고 은퇴했다. 유튜브에 다 나올 거다. 그 97세가 부르는 노래에 젊은 사람도 다 와서 보더라. 치매가 있는데도 노래는 하나도 안 틀리고 전성기 때와 똑같이 하더라. 치매라는데도, 그 분이 그 나이에 은퇴 하더라. 손으로 마지막 음을 잡고 끝내는데 그 표정과 객석 반응하고 '나도 저렇게 해보고 싶다'는 새악기 들 정도로 아름답더라. 대중의 환호가 더욱 멋있었다. 그 노인네에게 보내는 게. 박수고 함성이고. 나도 노래가 된다면 저렇게 하고 관둬야지 생각했다. 쉽지 않다"라며 웃었다.
끝으로 남진은 "데뷔 땐 흥으로 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노래가 나의 삶이고 인생이더라. 지금 이 나이에는 내 전부가 음악이라는 걸 알게 되더라. 처음엔 몰랐다"라고 말했다. 아직도 이루고 싶은 꿈에 대해 그는 "가수니까 좋은, 멋진 곡을 남기고 싶다. 지금은 히트가 되면 좋겠지만 그보다는 정말 멋있는 가사, 영원히 나올 수 있는 멜로디, 그 안에서 살다 마무리 하고 싶다. 한 곡이라도 그런 곡을 남기고 마무리 하고 싶다"라고 덧붙였다. / monamie@osen.co.kr
[사진] (주)바보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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