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친구아들’ 정해인, 정소민이 파고든 ‘동굴의 문’을 열다 [김재동의 나무와 숲]
OSEN 김재동 기자
발행 2024.09.16 14: 22

[OSEN=김재동 객원기자] “너는 제일 외롭고 힘든 순간에 너를 혼자 뒀어!”
15일 방송된 tvN ‘엄마친구아들’에서 최승효(정해인 분)가 위암수술 사실을 숨겨온 배석류(정소민 분)를 타박하는 장면이다. 개인적으로 문득 영화 ‘빠삐용’이 소환된다.
빠삐용은 꿈 속 사막 법정에서 자신을 기소한 검사를 만난다. 빠삐용이 “난 사람을 죽이지 않았소.”라 말하자 검사가 인정한다. “맞아. 넌 사람을 죽이지 않았지. 하지만 넌 사람을 죽인 것보다 더한 죄를 저질렀다.” “그게 뭐요?” 빠삐용이 되물었을 때 검사가 답한다. “인생을 낭비한 죄(guilty of wasting life)” 그 말을 듣고 빠삐용은 수긍한다. “유죄가 맞군.(I'm guilty)”

그 놀이터에서 최승효는 공박한다. “정말 힘들면 가까이 있는 사람한테 기대는 거야. 같이 쓰러지면 어때. 같이 바닥 치면 되지. 그랬다가 다시 일어나면 되지!”
석류가 자신없는 목소리로 반론한다. “나는 그러는 법을 몰라. 내가 이런 인간인 걸 어떡해!”
승효가 쐐기를 박듯이 재반박한다. “너는 나한테 해줬잖아. 니가 손 내밀었잖아. 나랑 있었잖아. 근데 넌 왜 나한테 그럴 기회를 안 줘? 니가 해줬던 걸 왜 난 못하게 해!”
“몰라. 나 갈래.”하고 사라지는 석류에게서 “아임 길티”하는 빠삐용의 목소리가 오버랩된다.
10회의 소제목은 ‘동굴의 곰’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굴을 파고 들어간다. 영국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은 ‘동굴의 우상’을 말했다. 즉, 동굴 속에 갇힌 인간은 자신들이 본 그림자만을 진리라고 여기면서 오류를 저지른다는 것이다.
이 같은 우상은 개인 고유의 특수한 본성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그가 받은 교육이나 다른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그가 읽은 책이나 존경하고 찬양하는 사람의 권위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선입관이나 편견에 사로잡힌 상태까지를 포함한 첫 인상의 차이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배석류가 획득한 우상에 따르면 사랑하는 사람이란 자신의 고통을 전가해선 안될 존재다.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지켜야 할 존재다. 그래서 위암수술을 가족에 말하지 않았고, 자신의 우울증에 고통받는 약혼자 송현준(한준우 분)을 스스로 떠나왔다.
그 배석류를 못잊어 한국까지 쫓아온 송현준도 고백한다. “난 널 어떻게든 일으켜 세울 생각만 했지. 너랑 같이 쓰러져 볼 생각을 못했어. 미안해! 내가 그때 네 아픔에 공감하지 못했어. 있는 그대로의 너를 내가 받아들이지 못했어.”
송현준의 동굴 속 우상은 사랑하는 이가 주저앉는다면 어떻게든 부축해 일으켜 세우는 것. 혀에 면도칼을 박고 독설을 퍼부어서라도 힘내서 살아보게 만드는 것이 옳은 사랑이란 확신였다. 정작 무너져 내린 석류로서는 주저앉아 있는 것 조차 죽을 힘을 다하고 있는 판인데 함께 쓰러져보지 못한 송현준은 부축자로서 우뚝 선 채 내려다만 보았다.
그 동굴 속에서 석류는 몸부림쳤다.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아무런 이유도, 죄도 없이 닥쳐온 병마의 고통이 억울했을 것이다. 외로운 촉수를 더듬어 ‘최승효’란 구원처를 기웃거렸을 때 열리지 않는 그 문 앞에서 함부로 버려진듯한 설움도 느꼈을 것이다.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생채기를 품고 현준을 떠나 가족 곁으로 돌아왔을 땐 아무런 문제 없던 시절의 배석류를 연기해야 했다. 자신의 아픔은 오롯이 자신만이 감당할 몫이었으니. 그랬는데..
저 망할 소꿉친구라는 최승효가 자신을 바닷물에 처박는다. 아픈 건 난데, 외로웠던 것도 나고 서러웠던 것도 난데 왜 지가 화를 내고 막 뭐라 그러는 지 석류로선 도무지 이해가 안간다.
한껏 도발한 최승효는 그래놓고 자탄한다. “내가 못들었더라. 네가 문 드드리는 소리. 너가 힘들다고 신호 보냈는데 내가 눈감고 귀막고 있었어. 그런 거 뻔히 알면서 너한테 괜히 모진 말이나 내뱉고 그런 내가 너무 한심하고 열받고 쓰레기 같아!”
승효의 그 말에 석류는 설움을 그러쥐고 있던 실 하나가 툭 끊기는 것을 느낀다. 그 틈새로 묵은 설움이 쏟아져 나온다. 승효를 때리며 퍼부었다. “너 왜 답장 안했어? 너 왜 내 전화 씹었어? 내가 아무한테도 말도 못하고 혼자서 얼마나 무서웠는데.. 엄마 아빠 쓰러질까봐 말도 못하고 너한테는 말할까 말까.. 너 아무 것도 모르잖아!”
소꿉친구의 말은 맞았다. 석류의 내면을 그득 채운 것은 솜뭉치가 아니라 소금였던 모양이다. 그 바닷물 속에서 시나브로 녹아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석류는 모처럼 체증이 가시듯 후련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승효가 데려간 아빠의 분식집. 철 지난 ‘배석류 귀국 환영회’가 어줍잖게 마련됐다. 그 자리서 배석류 모친 나미숙(박지영 분)여사가 선언한다. “우리는 가족야. 좋은 것만 함께 하자고 있는 가족 아냐. 아픈 거 힘든 거 같이 하자고 있는 게 가족이야.” 동참한 친구 정모음(김지은 분)도 선언한다. “친구도 가족이다.”
석류는 깨달았다.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은 모든 걸 함께 감당할 사람들인데 제 자신만 한사코 도리질 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들 속에서라면 피처럼 진했던 외로움도 묽어지고 우울에 처박힌 채 짓던 웃음이 더 이상 딴청이 아닌 폐부 깊숙이서 솟구칠 수 있다는 걸.
그렇게 배석류는 동굴의 문을 열었는데 승효부모 최경종(이승준 분)-서혜숙(장영남 분)의 동굴엔 사태처럼 토사가 흘러내려 문을 막을 지경이다.
외교부 동기 곽세환(조승연 분) 차관으로부터 명예퇴직 권고를 받은 서혜숙은 오랜 공직생활을 접기로 마음 먹고 남편 최경종(이승준 분)에게 말을 꺼내려는데 먼저 입을 뗀 최경종이 말한다. “우리 이혼해!”
최경종의 굴 속에 비친 그림자 속 서혜숙과 곽세환은 이미 오랜 연인이었기 때문이다.
자잘한 우여곡절을 겪지만 언제나 일상을 회복하는 드라마 ‘엄마친구아들’. 생애주기를 아우른 이 휴먼스토리엔 따뜻하고 유쾌한 위로가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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