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포스트시즌 초유의 서스펜디드 게임이 결국 한국시리즈 판도를 확 바꿔놓았다. 1차전 서스펜디드 게임이 재개된 뒤 2차전까지 스코어는 13-3, KIA의 일방적인 흐름으로 전세가 뒤집혔다. 한국시리즈 최초로 하루에 2승을 거둔 KIA와 삼성의 희비가 완전히 엇갈렸다. 흐름과 멘탈이 중요한 야구의 특성이 고스란히 반영됐다.
지난 23일 광주-기아 챔피언스필드에서 치러진 2024 KBO 한국시리즈(KS·7전4선승제) 1차전 서스펜디드 게임과 2차전을 모두 KIA가 이겼다. 1차전을 5-1 역전승으로 장식하며 기선 제압에 성공한 KIA는 2차전도 8-3 완승을 거두며 하루에 2승을 쓸어담았다. 역대 KS에서 1~2차전 모두 승리한 팀 우승 확률은 90%(20회 중 18회)에 달한다.
결국 이틀 전 서스펜디드 게임이 된 것이 KS 판을 뒤흔들어 놓았다. 지난 21일 열린 1차전에서 양 팀은 5회까지 팽팽하게 맞섰다. KIA 제임스 네일과 삼성 원태인이 나란히 무실점으로 호투했지만 6회초 삼성이 선취점을 냈다. 선두타자 김헌곤의 솔로 홈런으로 0의 균형을 깬 뒤 르윈 디아즈의 볼넷으로 네일을 강판시켰다.
바뀐 투수 장현식을 상대로 강민호가 볼넷을 얻어내며 무사 1,2루 찬스를 잡은 삼성. 김영웅 타석 장현식의 초구가 또 볼이 되면서 제구가 계속 흔들렸다. 삼성의 상승 흐름이었지만 하필 이때 빗줄기가 굵어졌다. 경기 내내 비가 내린 상태에서 진행했지만 묘한 타이밍에 경기가 끊겼다. 오후 9시24분 심판진이 우천 중단을 결정했고, 45분을 기다린 끝에 결국 서스펜디드 게임이 선언됐다.
기세를 바짝 올리던 삼성에 찬물을 끼얹은 순간이었다. 5회까지 투구수 66개로 효율적인 투구를 하던 선발 원태인을 더 쓰지 못하고 소모한 것이 뼈아팠다. 못 해도 7회까지 던질 수 있는 페이스였던 원태인을 어쩔 수 없이 교체하게 된 것도 아까운데, 경기 흐름 면에서 더욱 아쉬웠다.
이틀 미뤄져 23일 오후 4시 재개된 서스펜디드 게임에서 결국 삼성과 KIA의 운명이 바뀌었다. KIA는 6회초 무사 1,2루 김영웅 타석에 불펜 에이스 전상현 카드를 꺼냈다. 전상현은 초구를 던지기에 앞서 발을 빼고 2루로 견제 모션을 취하며 번트를 대기 위해 배트를 내린 김영웅의 모습을 확인했다. 상대 작전을 간파하는 데 성공한 KIA의 수비는 기민했다. 김영웅의 번트가 포수 앞에 떨어졌고, 김태군이 빠르게 3루로 던져 2루 선행 주자를 먼저 잡았다. 전상현은 박병호를 몸쪽 직구로 체크 스윙을 이끌어내며 삼진 처리한 뒤 윤정빈에 볼넷을 주며 2사 만루가 됐지만 이재현을 투수 땅볼 처리하며 큰 고비를 넘겼다.
결국 KIA가 7회말 2사 후 4득점을 몰아치며 역전했다. 삼성 투수 임창민의 2구 연속 폭투로 3루 주자가 연이어 홈에 들어오며 동점에 역전까지 한 KIA는 소크라테스 브리토와 김도영의 연속 적시타가 터지며 4-1로 달아났다. 8회말에도 2사 후 최원준의 안타와 김태군의 2루타로 1점을 더해 쐐기를 박았다.
그 흐름이 1차전 종료 시점으로부터 1시간2분 뒤 열린 2차전에도 이어졌다. 1회말부터 KIA는 삼성 선발 황동재에게 4연속 포함 안타 5개를 몰아치며 대거 5득점 빅이닝을 펼쳤다. 2회말 김도영의 KS 첫 홈런이 터지는 등 타선 힘으로 일찌감치 승기를 잡았다. 서스펜디드가 되기 전까지 원태인에게 산발 2안타로 막혔던 타선의 혈이 시원하게 뚤렸다. 서스펜디드 게임이 재개된 이후 스코어는 13-3으로 KIA가 10점을 앞섰다. 삼성에 명백한 전력 우위, 힘의 차이를 확인시켰다.
KS 1차전에선 1위팀이 늘 실전 공백이라는 핸디캡을 안고 시작한다. 정규시즌 종료 후 3주 실전 공백으로 쉬었던 타자들이 타격감을 빨리 찾는 게 중요하다. 1차전이 서스펜디드 게임이 되기 전까지 KIA 타자들도 같은 흐름이었다. 가을야구 경험이 많지 안은 선수들은 긴장하거나 너무 들뜬 경향도 있었다. 하지만 경기가 일시 중단됐고, 1차전 5이닝을 치른 게 실질적으로 한 경기를 치른 효과를 봤다.
경기 후 이범호 KIA 감독은 “하루에 2경기를 다 잡을 거라고 생각 안 했다. 1차전에서 전상현이 중요한 상황에 정말 잘 끊어줬다. 그 상황을 이겨내며 2차전을 조금 더 편하게 치렀다”며 “이틀 전에 경기를 한 덕분에 타자들의 몸이 풀리지 않았나 싶다. 첫 경기 하고 나면 두 번째 경기부터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있다. 5이닝을 하고 쉬었기 때문에 상황적으로 선수들이 (첫 경기라서) 긴장하는 모습도 사라졌다”고 말했다.
서스펜디드 게임에서 쐐기 적시타로 KS 첫 안타 손맛을 본 뒤 2차전에서 KS 첫 홈런과 도루까지 해낸 김도영은 “쉬는 사이 찝찝함이 남아있었다. 날씨가 좋았으면 어땠을까 생각했고, 오늘은 조금 더 비장한 마음으로 했다”며 “(21일 1차전 전날에는) 최고 컨디션을 만들기 위해 일찍 자려고 한 것이 독이 됐던 것 같다. 어제오늘은 평소에 자던 시간에 자니까 잠도 잘 오고, 오늘 컨디션도 괜찮았던 것 같다”고 돌아봤다.
삼성으로선 서스펜디드 게임이 결국 악재가 되고 말았다. 언더독 입장에선 분위기를 잘 타는 게 중요한데 절호의 찬스에서 흐름이 뚝 끊겼다. 설상가상으로 1차전 충격 역전패의 잔상이 가시기도 전에 2차전을 바로 치르면서 가라앉은 분위기가 쭉 이어졌다. 박진만 삼성 감독도 “1차전 패배가 2차전에 영향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고 아쉬워하며 “우리가 이기는 경기를 하려면 장타가 많이 나와야 한다. (타자 친화적인) 대구에 가니까 3차전부턴 장타를 생산해 좋은 흐름으로 분위기를 바꿔보겠다”고 반격을 다짐했다.
그러나 객관적인 전력에서 우세한 KIA가 서스펜디드 이후 실전 감각을 찾았고, 체력도 쌩쌩해 삼성의 반격이 쉽지 않다. 22일 순연으로 휴식일을 하루 벌어 원태인이 4일 쉬고 4차전 선발로 나설 수 있는 일정이지만 KIA도 마찬가지로 네일의 등판이 4차전으로 앞당겨진다. 삼성이 우위를 점하는 요소가 없는 상황에서 하루에 2패 충격을 수습하기가 만만치 않다. 이대로라면 KIA의 4전 전승으로 끝날 수도 있다. 역대 KS 4전 전승 우승은 1987년 해태, 1990년 LG, 1991년 해태, 1994년 LG, 2005년 삼성, 2010년 SK, 2016년 두산, 2019년 두산, 2021년 KT 등 모두 9번 있었다. 삼성은 1987년, 1990년, 2010년 3번이나 4전 전패 준우승으로 끝난 아픔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