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특히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철칙이 지배하는 프로 마당에서, 감독의 비중은 얼마나 될까? 일반화할 수 없을지 몰라도, 프로축구에서만큼은 대단히 높다고 할 수 있을 성싶다. 실례가 입증한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황금기를 연출했던 알렉스 퍼거슨, 맨체스터 시티의 전성시대를 창출하고 있는 펩 과르디올라 등 일세를 풍미했거나 휩쓰는 명장들이 빚어낸 빛나는 결실에서, 충분히 엿볼 수 있는 사실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우리네 속담처럼, 이들은 뛰어난 선수 장악력을 바탕으로 무척 돋보이는 전과를 올렸다.
2024-2025시즌이 한창 빚어지는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EPL)에, 앞날이 무척 기대되는 또 하나의 사령탑이 출현한 듯하다. 이번 시즌 브라이턴 & 호브 앨비언의 돌풍을 이끄는, 독일 출신의 파비안 휘르첼러 감독(31)이다. 유러피안 빅 5리그 초보 감독이 떨치는 연부역강(年富力強)에서 우러난 역량은 EPL을 ‘휘르첼러 바람’으로 뒤덮고 있다.
지난 6월 말, 브라이턴 구단이 내린 결단은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브라이턴 팬들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문의 시선을 감추지 않았다. 그럴 만했다. EPL 사상 최연소 사령탑이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 5대 리그에서 단 한 번도 사령탑에 앉은 적이 없는 초보 중의 초보 감독을 선임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한마디로, 도박성 짙은 ‘위험한 영입’이었다.
휘르첼러 감독이 얼마나 젊은 사령탑인지는 이번 시즌 개막전을 보면 단적으로 나타난다. 에버턴과 치른 첫 경기에서, 브라이턴의 선발 출장 11명 가운데 5명이 휘르첼러 감독보다 더 나이가 많았다. 미드필더 제임스 밀너(38)보다는 무려 7살이나 적었다.
그러나 결과는 딴판이었다. 브라이턴이 3-0으로 완승했다. 더구나 적지(구디슨 파크)에서 벌어진 경기였는데도, 산뜻한 첫걸음을 내디딘 쾌승이었다. 마치 이번 시즌 일으킬 회오리바람을 예고라도 하듯 말이다.
3년 계약(~2027년 6월 30일)을 맺고 7월 1일부터 지휘봉을 잡은 이 젊디젊은 감독은 불과 몇 달 만에 이번 시즌 초반 EPL 최대 화두의 하나로 떠올랐다. EPL을 주름잡는 내로라하는 명장들과도 얼마든지 맞설 힘을 갖춘 ‘그릇’임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고 있다.
아직 38경기를 치르는 대장정의 ⅓을 채 소화하지 않긴 했어도, 휘르첼러 감독의 재능은 기록상으로도 여실히 검증됐다. 12경기를 치렀을 때, 브라이턴이 ‘휘르첼러 체제’만큼 많은 승점을 쌓은 시즌은 여태껏 없었다. 전임 로베르토 데 체르비 감독이 직전 시즌(2023-2024) 세운 구단 자체 종전 최고 승점보다 3점(22-19)을 더 쌓아 올렸다(표 참조). 12경기에서, 휘르첼러 감독은 6승 4무 2패의 전과를 올렸다. 반면, 데 체르비 감독은 5승 4무 4패를 거뒀다.
“브라이턴, UCL에 진출해도 놀랄 일 아니다”라는 전문가까지 등장
당연히 순위도 껑충 뛰어올랐다. 12라운드를 기준으로 했을 때, 이번 시즌 브라이턴은 5위에 자리했다. 지난 시즌 8위와 비교하면 괄목상대할 도약이다. 비록 겉으로는 세 걸음 차처럼 보이겠지만, 체감상으로는 상위권과 중위권은 천양지차다. 더구나 일부 팀들이 13라운드를 소화하지 않은 지난달 30일(현지 일자)엔, 3위까지 치고 올라가는 기현상(?)마저 빚어냈다.
참으로, 역대 EPL에선 볼 수 없었던 매우 낯선 반등의 모양새다. 2017-2018시즌 EPL에 첫선을 보인 브라이턴은 이후 많은 시즌을 하위권에서 맴돌았다. 지난 7시즌(15→ 17→ 15→ 16→ 9→ 6→ 11위) 가운데 4시즌이 15위 이하였을 정도였다. ‘신흥 거상 구단’으로 떠오른 2020년대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중위권으로 발돋움했다.
이번 시즌, 브라이턴의 희생양이 됐던 팀 중 상당수가 명문 클럽이었다는 점에서도, 휘르첼러 감독이 일으킨 브라이턴 돌풍의 강도가 얼마나 거센지 능히 엿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맨체스터의 두 ‘거인’이 모두 나가떨어졌다. EPL 4연패(2020-2021~2023-2024시즌)의 신기원을 이룬 맨체스터 시티(11라운드·1-2 패)와 최고 명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2라운드·1-2 패)가 모두 그 돌풍에 휩싸여 주저앉았다. 7라운드에서 맞선, 매 시즌 우승권에 포진하는 토트넘 홋스퍼도 마찬가지 운명이었다. 2골을 선취하고도 내리 3골을 내주며 역전패(2-3)의 비운을 감내해야 했다.
이번 시즌 휘르첼러 체제의 ‘신바람 행진’에 제동을 건 팀은 리버풀과 첼시뿐이다. EPL 우승을 넘보는 전력을 갖춘, 정상권에 포진한 팀답게 회오리바람에 휘말리지 않았다. 여유 있게 선두를 내달리는 리버풀은 2-1(11라운드)로, 이번 시즌 부흥을 노리는 첼시는 골을 주고받는 공방전 끝에 4-2(6라운드)로, 각각 브라이턴의 돌풍을 잠재웠다.
휘르첼러 감독이 지닌 역량을 최대치로 발휘할 수 있는 바탕엔, 구단의 뒷받침이 존재한다. 토니 블룸 구단주와 폴 바버 CEO의 ‘이인삼각’ 체제하의 구단 운영은 현대적이고 미래지향적이며 혁신적으로 높게 평가받는다. 지난 몇 년간 유럽에서 가장 잘 운영되는 클럽 가운데 하나라는 평판을 얻기까지 했다.
투자도 아끼지 않음으로써 휘르첼러 감독의 사기를 북돋우는 점도 급상승세의 한 요소다. 지난여름 이적시장에서, 브라이턴은 세계 프로축구 구단에서 두 번째로 많은 금액을 쏟아부었다.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영입한 조르지뇨 뤼터(22)를 비롯한 7명의 선수를 데려오기 위해 2억 3,100만 유로(한화 약 3,414억 원)를 아낌없이 뿌렸다. 브라이턴보다 많은 투자를 한 클럽은 2억 3,900만 유로(약 3,533억 원)를 서슴지 않은 첼시뿐이었다.
그렇다면 이번 시즌이 끝났을 때, 브라이턴이 유럽 클럽 대항전에 나갈 수 있을까? 그 물음에, 대답은 긍정적이다. 대표적으로, 트랜스퍼마크트는 “유럽 무대에 첫선을 보일 게 확실시된다”라고 장담한다. 이적에 정통하고 권위 있는 이 세계적 축구 웹사이트는 아예 한 걸음 더 나아간 전망을 내놓았다. “브라이턴이 UEFA[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UCL)에 진출한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과연 휘르첼러 감독을 중핵으로 한 브라이턴 돌풍이 그 기세를 시즌 끝까지 잃지 않고 이어 갈지, 이번 시즌 EPL을 지켜볼 또 하나의 흥밋거리임은 분명하다.
전 베스트 일레븐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