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 번 말해줄래?”
LA 다저스 최고 경영자(CEO)인 스탠 카스텐 회장은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 지난해 이맘때 ‘FA 최대어’ 오타니 쇼헤이(30) 영입전에 뛰어들었던 다저스는 그로부터 “연봉 전부를 나중에 받아도 좋다”는 역제안을 받고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미국 ‘USA투데이 스포츠’는 지난 6일(이하 한국시간) 오타니 특집 기사를 통해 지난겨울 이적 과정을 조명했다. 다저스와 10년 7억 달러로 전 세계 스포츠 역대 최고액에 FA 계약한 오타니는 그 중 97.1%에 달하는 6억8000만 달러를 추후 지급받는 ‘디퍼(지불 유예)’를 넣었다.
디퍼는 구단 친화적인 계약 조건이다. 물가 상승률을 고려하면 연봉을 제때 지급받는 게 선수한테 좋다. 하지만 오타니는 지금껏 전례가 없는 97.1%의 디퍼를 감수했다. 아무리 후원 계약으로 많은 돈을 번다고 해도 말도 안 되는 조건인데 이를 오타니가 먼저 다저스에 제안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1년 전을 떠올린 카스텐 회장은 “앤드류 프리드먼 야구운영사장으로부터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가 떠오른다. ‘다시 한 번 말해줄래?’라는 것이 나의 솔직한 반응이었다”고 말했다.
카스텐 회장만큼 오타니의 에이전트는 네즈 발레로도 놀랐다. 발레로는 “선수로서 이렇게 많은 것을 포기하는 이타적인 모습을 다신 볼 수 없을 것 같다. 지금까지 그 정도 수준의 디퍼는 없었고, 업계에 큰 파장을 미쳤다. 오타니는 구단에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했고, ‘연봉의 전부 또는 일부를 나중에 받으면 어떨까? 난 재정적으로 괜찮다’는 말을 했다”고 떠올렸다.
이어 발레로는 “궁극적으로 다저스가 매해 경쟁력을 갖추고, 좋은 선수들을 영입해 우승 수준의 팀을 구성하는 것이 오타니에겐 중요했다. 그는 비전을 갖고 있었고, 그 비전은 모두 실현됐다”고 말했다.
오타니가 연봉의 대부분을 나중에 받기로 하면서 다저스는 페이롤(팀 연봉 총액)에 여유가 생겼다. 디퍼에 의해 오타니의 사치세 기준 연봉은 7000만 달러에서 4600만 달러로 낮게 잡혔다. 여유 공간이 생긴 다저스는 탬파베이 레이스 에이스 타일러 글래스노우를 트레이드로 데려와 5년 1억3650만 달러에 연장 계약했고, FA 투수 최대어 야마모토 요시노부를 12년 3억2500만 달러에 영입했다. FA 외야수 테오스카 에르난데스도 1년 2350만 달러에 잡으며 투타에서 전력 보강을 제대로 했다. 그 결과 이적 첫 해부터 오타니는 월드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품었다.
오타니는 “확실히 보람 있는 일이었다. 마크 월터 등 구단주들, 프리드먼 사장과 함께 최고의 팀을 만들겠다고 서로 약속했다. 월드시리즈 우승을 했으니 서로 약속을 지킨 셈이다”며 “지금 다저스가 구장을 리모델링(클럽하우스 1억 달러 투자)하고, 다른 선수들과 계약하기 위해 더 많은 자금을 투입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우리 모두가 월드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는 사실에 보람을 느낀다”고 큰 의미를 부여했다.
오타니가 큰 결심을 하면서 다저스는 슈퍼팀을 구축할 수 있었다. 오타니에 앞서 무키 베츠(3억6억5000만 달러 중 1억1500만 달러), 프레디 프리먼(1억6200만 달러 중 5700만 달러)도 디퍼가 들어간 계약을 했는데 오타니 이후 더 많은 선수들이 이런 계약을 감수했다.
테오스카 에르난데스(2350만 달러 중 850만 달러), 윌 스미스(1억4000만 달러 중 5000만 달러)에 이어 이번 오프시즌 토미 에드먼(7400만 달러 중 2500만 달러), 블레이크 스넬(1억8200만 달러 중 6600만 달러)도 디퍼를 감수하며 다저스와 계약했다. USA투데이 스포츠에 따르면 2028년부터 2046년까지 다저스가 추후 지급해야 할 연봉 총액만 10억600만 달러에 이른다.
다저스의 디퍼 계약이 잇따르자 ‘돈으로 야구하는 팀’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하지만 다저스가 선수들에게 강요한 계약이 아니다. 선수들이 불리한 조건을 감수할 정도로 다저스는 모두가 오고 싶어 하는 매력적인 팀이 됐다. 카스텐 회장은 “아무도 공짜가 아니다. 신비로운 것도 아니다. NBA(미국프로농구)에선 1970년대부터 디퍼가 있었다. 다만 금액이 다를 뿐이다”고 반박했다.
다저스 공동 구단주인 토드 보엘리는 “오타니는 세계 역사상 가장 놀라운 야구선수가 되고 싶어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월드시리즈 우승을 해야 하고, 더 나은 팀을 만들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오타니가 그런 결정을 하면서 구단을 훨씬 더 좋게 만들었다”며 오타니의 결단을 치켜세웠다.
USA투데이 스포츠는 ‘오타니는 54홈런 59도루로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즌 중 하나를 보냈고, 만장일치로 내셔널리그 MVP를 받았다. 1988년 이후 처음으로 풀시즌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다저스는 프랜차이즈 사상 두 번째 많은 394만명의 관중을 동원했고, 5만명 이상 입장한 37경기 포함 평균 4만9067명으로 리그 최다 관중을 기록했다’며 ‘오타니는 부자가 됐고, 다저스는 더 큰 부자가 됐다. 오타니와 계약한 이후 일본 기업들과 수익성 높은 후원 계약들을 체결했고, 상품 및 티켓 판매까지 약 1억20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린 것으로 추산된다’고 전했다.
오타니는 다저스에서의 첫 시즌을 돌아보며 “기대 이상이었다.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했다. 더 이상 무엇을 바랄 수 있겠나?”라며 “다저스는 그동안 많은 성공을 거뒀고, 거의 매년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난 LA 에인절스 소속이었고, 외부에서 볼 때는 다저스의 플레이오프 진출이 쉬워 보였다. 하지만 팀의 일원이 되어 보니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것만으로도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시즌 막판 샌디에이고 파드리스가 맹공을 퍼부었고, 이를 막아내는 건 정말 힘든 경험이었다. 하지만 매우 특별하고 감동적이었으며 정말 즐거웠다”고 말했다. 지난해 9월 팔꿈치 수술을 받고 올해 타자에만 전념한 오타니는 재활 상태에 대해서도 “모든 것이 지금까지 잘 진행되고 있다”며 투타겸업 복귀를 자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