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도둑들2’라는 익숙하고 안전한 길 대신 한국 대중문화 흥행 불모지로 불리는 1930년대를 주목한 최동훈 감독의 시도는 일단 반갑다. 상업 예술가가 내딛는 한 걸음은 적어도 자신이 지금껏 쌓아온 과업과 문턱을 넘어서기 위한 행보여야 하고 대중의 더 큰 지지를 이끌어내야 하는 일종의 숙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최동훈의 다섯 번째 장편 ‘암살’이 케이퍼 장르에 최적화된 최동훈 영화답지 않다는 일부 불만이 나오는 건 이 영화가 항일 독립운동이라는 엄숙한 시대적 공기를 담고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동안 손발을 맞춰온 촬영감독과의 한시적 결별은 그가 이 작품을 통해 자기 한계에 갇히지 않겠다는 의지이자 다짐을 엿볼 수 있는 꽤 의미 있는 발화점이기도 하다.
확실히 새로운 걸 받아들이기 위해선 지금껏 알고 있던 선입견과 지식을 비워내야 하고, 순도 높은 사랑을 위해선 자질구레한 애착에서 과감히 벗어나야 하는 것처럼 최동훈 감독도 ‘암살’을 위해 상당 부분 자신의 익숙함과 영화 문법을 내려놓은 듯싶다. 팀플레이 도중 배신자가 나오고 그 밀정에게 그럴 만한 속사정과 트라우마가 있다는 설정은 얼핏 ‘도둑들’과 흡사하지만 이를 다루는 방식은 한결 섬세해졌다.
일본의 황국식민화가 절정으로 치닫던 1933년, 경성과 상해를 오가는 ‘암살’은 첩보물을 보는 것 같은 서스펜스와 카타르시스가 주요 뇌관으로 장착돼 있는 액션극이다. 자칫 무겁고 민족주의라는 자기 함정에 함몰되기 쉬운 서사이지만 감독은 자신의 전매특허인 캐릭터 무비로 풀어내며 관객과 접점을 만들어낸다. 초반 20분 등장인물 소개를 끝내고 앞으로 이들의 활약과 험난한 좌충우돌을 예고하는 방식 또한 여전히 경쾌하다. 다만, 인물 소개가 지나치게 대사에 의지한다는 점은 아쉽다.
‘암살’의 센터포워드는 크레딧 기호 1번 옥윤(전지현)이다. 태생적 비밀을 간직한 그녀는 상관을 사살한 죄로 감옥에 갇히지만 임시정부의 부름을 받고 원흉 암살 적임자로 차출된다. 저격수에게 치명적인 낮은 시력이 핸디캡이지만, 한쪽이 깨진 안경은 그가 방아쇠에 검지를 걸 때마다 더욱 절박해지는 효과를 낳고 중반부 미츠코시 백화점에서 거사를 앞두고 새로 맞춘 안경은 영화 흐름이 바뀌는 변곡점으로 작용한다.
옥윤을 중심으로 한 두 남자의 대립 역시 이 영화의 교환 가치를 높여주는 또 다른 축이다. 김구의 오른팔인 임시정부 경무대장 염석진(이정재)과 그로부터 옥윤을 제거해달라는 살인 의뢰를 받는 청부업자 하와이 피스톨(하정우)의 충돌과 긴박함은 자칫 진부할 수 있는 내러티브에 생동감을 부여한다.
극중 옥윤 다음으로 매력적인 배역을 맡은 이정재는 ‘신세계’의 이자성과 흡사한 딜레마에 시달리지만 좀 더 확신범이라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해방 직후 경찰 간부가 돼 벌이는 반민특위 법정 장면은 그가 왜 15kg이나 감량하며 이 신에 집중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신세계’에서 열연에도 불구 분량 대비 황정민의 아우라에 밀렸다면 이번 작품으로 그때의 한과 아쉬움을 모두 푼 것 같은 호연이었다.
‘암살’은 최동훈 영화 특유의 리듬감과 속도감에 주력하기보다 인물간의 충돌과 심경 변화, 이들의 동맹과 연합이 묘하게 틀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스파크에 더 집중한다. 가령 옥윤이 조선주둔군 사령관 카와구치와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파 강인국(이경영)을 조준하며 알게 된 태생적 비밀과 애잔함, 그런 옥윤을 죽여야 하지만 실체에 접근한 뒤 연민이란 낯선 감정에 봉착하는 하와이 피스톨, 어떻게든 살아남는 게 중요한 기회주의자 염석진의 복잡한 변심 등이 터닝 포인트가 되며 영화적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내로라하는 비싼 배우들답게 누구 하나 평균 점수를 깎아먹지 않으며 합을 맞췄다. 한때 할리우드 진출을 모색했다가 한동안 경계선에 머물러야 했던 전지현은 ‘도둑들’에 이어 ‘암살’로 모처럼 자신의 쓰임새를 한번 더 입증했다. 더 이상 미모나 몸매가 아닌 연기력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시킨 비결은 역설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감정을 누를 수 있는 데까지 절제한 데에서 빛났다는 생각이다. 좋은 선장을 만난 덕이겠지만 이런 것도 할 수 있다는 치기어린 표현욕 보다 감정 게이지를 최대한 낮추며 오히려 더 많은 걸 보여주는, 여백 있는 연기에 한 발 다가섰다.
암살 비밀 요원 속사포로 참여한 조진웅은 이번에도 뛰어난 가성비 조연 연기를 보여준다. 극중 하정우가 풍미 깊은 아메리카노라면, 조진웅은 적당히 시럽 넣은 카페 라떼 같은 달달함으로 무거울 수 있는 영화의 희극적 요소를 도맡았다. 적당히 때가 묻었지만 누구보다 자존심과 민족애가 투철한 속사포를 뭉클하게 그려냈다.
옥에 티까진 아니어도 국내 최고의 흥행사 최동훈이기에 아쉬웠던 지점도 몇 군데 있다. 옥윤과 석진, 하와이 피스톨 3인의 과거 행적과 이들의 딜레마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과 달리 친일파 이경영의 가족을 대하는 태도가 지나치게 단선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또 옥윤이 제거 대상 집에 잠입한 뒤 마치 라식 수술이라도 받은 것처럼 안경 없이 현란하게 총을 다루는 모습도 고개를 갸웃하게 했다. 배달을 앞둔 안경집에 붙어있던 주소 택이 책 사이에서 발견되는 것도 인과관계가 깔끔하지 않았다. 139분. 22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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