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첫 천만 관중을 돌파한 KBO리그의 대표 에이스들은 왜 프리미어12에서 모두 ‘오프너’로 전락한 것일까. 프리미어12에 나선 대표팀의 선발 붕괴가 유독 뼈아팠던 이유는 이들이 모두 국내에서 107억 원 에이스, 다승왕, 50억 원 토종 에이스로 불리며 극진한 대접을 받는 선수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번 대회에서도 한국 야구는 우물 안 개구리였고, 우물 밖 경쟁력을 입증하지 못했다.
# 고영표는 지난 2월 5년 총액 107억 원(보장액 95억 원, 옵션 12억 원)에 KT 위즈 구단 최초 비FA 다년계약을 체결했다. 107억 원 가운데 보장액이 무려 95억 원에 달하는 초대형 잭팟을 터트리면서 2018년 황재균의 4년 88억 원을 넘어 구단 최고액의 사나이로 우뚝 섰다. 고영표의 2024시즌 연봉은 20억 원.
# 2018년 두산 베어스 1차지명 출신 곽빈은 올해 한층 업그레이드 된 구위와 제구를 앞세워 30경기 15승 9패 평균자책점 4.24로 호투했다. 외국인투수들이 연이어 제 몫을 하지 못한 상황에서 1선발 역할을 수행했고, 그 결과 원태인(삼성 라이온즈)과 함께 2017년 양현종(KIA 타이거즈) 이후 7년 만에 토종 다승왕을 거머쥐었다. 올해 연봉은 2억1000만 원.
# LG 트윈스 토종 에이스 임찬규는 작년 12월 원소속팀 LG와 4년 총액 50억 원(계약금 6억 원, 연봉 20억 원, 인센티브 24억 원)에 FA 계약을 체결했다. 올해 연봉 2억 원과 함께 2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달성했고, 포스트시즌에서 외국인투수급 호투를 펼치며 빅게임피처로 거듭났다.
류중일 야구대표팀은 감독은 지난 18일 호주와의 2024 WBSC 프리미어12 최종전을 마치고 취재진과 만나 조별예선 탈락 요인으로 ‘선발야구 붕괴’를 꼽았다. 위에 언급된 정상급 투수들이 프리미어12 선발진의 한 축을 담당했지만, 불운하게도 모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냉정히 말해 제 역할을 떠나 ‘오프너’와 다름없는 투구로 실망을 안겼다.
류 감독은 "향후 보완점이 많다. 이번 대회는 선발투수 싸움에서 졌지 않았나 싶다”라며 “앞으로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는 선발투수를 조금 더 키워야 한다. 일본 투수들을 보면서 삼진 잡아낼 수 있는 공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굉장히 부러웠다"라고 털어놨다.
사령탑의 말대로 대표팀은 대만전부터 도미니카공화국전까지 4경기 동안 단 한 번도 선발야구를 하지 못했다. 에이스 고영표의 대만전 피홈런 두 방 포함 2이닝 6실점 붕괴를 시작으로 쿠바전 또한 곽빈이 4이닝 무실점으로 5회를 채우지 못했고, 일본전 선발 최승용도 1⅔이닝 2실점 조기 교체로 새로운 일본 킬러가 되지 못했다. 그리고 16일 도미니카공화국을 맞아 빅게임피처로 불린 임찬규마저 3이닝 3실점으로 일찍 바통을 넘겼다.
최승용을 제외한 3인은 위에서도 언급했듯 국내에서 모두 에이스, 다승왕, FA 고액연봉자로 불리는 정상급 선발 자원이다. 고영표는 퀄리티스타트를 밥 먹듯이 한다고 해 ‘고퀄스’라는 별명이 붙었고, 곽빈의 경우 올해 167⅔이닝을 소화하며 이닝 부문 토종 3위에 이름을 올렸다. 임찬규 역시 134이닝 소화 및 11차례의 퀄리티스타트로 선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러나 한국을 떠나 국제 무대로 나온 이들은 5이닝도 소화하지 못하는 B급 선발투수가 돼 버렸다. 5이닝은커녕 타선이 한 바퀴만 돌면 고전을 면치 못하며 불펜 과부하를 초래했다. 류중일호는 5경기에서 선발투수가 14⅓이닝밖에 합작하지 못했고, 11자책점을 내주면서 선발 평균자책점 6.91이라는 씁쓸한 수치를 확인했다.
그래도 대회 초반에는 선발 붕괴를 탄탄한 불펜으로 커버할 수 있었으나 선발 조기 강판이 거듭되면서 불펜 호출이 잦아졌고, 일본전부터 불펜투수들마저 힘을 쓰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천만 관중의 열렬한 응원을 받는 에이스들이 모두 우물안 개구리였다는 게 입증된 순간이었다. 한국야구는 류현진(한화 이글스), 김광현(SSG 랜더스), 양현종(KIA 타이거즈)의 시대 이후 국제대회 경기를 온전히 책임질만한 선발투수를 오랫동안 찾지 못하고 있다.
투타 전력이 세계 정상급 수준인 일본은 그렇다 쳐도 대만전 3-6 패배는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국제대회마다 1승 제물로 여겨졌던 팀이 이제 한국야구를 위협하는 난적으로 올라섰기 때문. 대만프로야구 구단은 6개에 불과하며, 평균 연봉도 KBO리그의 절반 수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대만을 상대로 ‘107억 원 에이스’ 고영표가 만루홈런과 2점홈런을 맞았으니 어떻게 보면 예선 탈락은 당연한 결과였다.
류 감독은 “대만은 유망주들을 다 외국으로 보내버린다. 우리나라는 아니지 않나. 대만은 조금이라도 유망한 선수가 있으면 다 외국으로 보내고, 국제대회를 할 때 그들을 다 소집한다. 그런 부분에서 차이가 나지 않나 싶다. 투수가 정말 좋아보였다”라고 대만 야구가 발전한 요인을 분석했다.
다만 고무적인 부분이 있다면 류중일호는 이번 대회 연령 제한이 없었음에도 2026년 WBC와 2028년 LA 올림픽을 겨냥한 젊은 엔트리를 꾸렸다. 그 결과 곽빈, 최승용 등 어린 투수들이 또 다른 국제 경험을 쌓았고, 여기에 문동주, 원태인, 손주영, 이의리, 박세웅 등이 합류한다면 2026년 WBC에서 과거 류현진, 김광현이 그랬던 것처럼 선발야구가 부활할지도 모른다.
이제 WBC까지 남은 기간은 약 16개월. 참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천만 관중 인기에 도취되기 이전에 실력을 키우고 내실을 다져야 한다. 국제대회에서 최소 5이닝 소화가 가능한 토종 선발투수를 최소 3명은 만들어야 그토록 바라는 조별예선 통과를 해낼 수 있다.
최일언 대표팀 투수코치는 “이제 다음 대회까지 15개월 가량 남았다. 일본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에 비슷한 수준까지는 올라가야 한다”라며 “프로야구에서 2선발 정도는 국내 선수가 차지해야 한다. 그래야 레벨이 높아진다. 과거에는 류현진, 윤석민, 김광현이 용병보다 잘 던졌다. 그러나 지금은 원투펀치가 다 용병이다. 팀 별로 1~2명씩 선발투수가 나타나지 않으면 (WBC 또한) 상당히 힘들 것이다”라고 바라봤다.
그러면서 “대표팀 코치를 하면서 3년 동안 일본을 많이 돌아다녔다. 대학야구, 실업야구도 봤다”라며 “그들은 정말 연습을 많이 한다. 공도 많이 던진다. 반면 우리나라는 공을 많이 안 던지는 문화가 생겼다. 제구력을 키우고 스트라이크 하나를 확실히 잡기 위해서는 훈련을 많이 해야 한다. 웨이트트레이닝도 쉬지 않고 해야 부상을 방지할 수 있다. 몸을 만들어서 밸런스를 유지해야 한다”라고 힘줘 말했다.
이번 대회를 통해 선발야구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느낀 류 감독은 “WBC까지 15개월 정도 남았는데 왜 자꾸 세계대회에 나와 예선 탈락하는지 분석해야 한다.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빠르다고 하지 않나. 잘 준비해서 무엇이 문제였는지 차근차근 계산해서 다음 WBC에서 꼭 본선에 진출할 수 있도록 연구 잘하겠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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